4 9월 2017

[기자수첩] 요즘 고생하는 CIA가 10년 전 주었던 잠언 다시 읽기

[기자수첩] 요즘 고생하는 CIA가 10년 전 주었던 잠언 다시 읽기

약 10년 전 공개된 CIA의 오래된 기밀 문건…읽으며 웃다가 찔리다가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지금이야 위키리크스라는 단체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 CIA의 기밀 문건이 드러난다고 깜짝깜짝 놀라지는 않지만, 그 전에는 가끔 기밀 목록에서 제외된 오래된 문건이 세상에 공개되면 신기하게 읽어보곤 했다. 그 중 하나가 2008년 공개된 ‘손쉬운 방해공작 현장 매뉴얼’이다. 1944년에 작성된 문건으로 지금 생각하면 ‘유치가 찬란한’ 내용이다. 그러나 아직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묘한 아이러니도 존재한다.

[이미지 = iclickart]

제목 그대로 현장에서 물리적 스파이 활동을 실제로 하고 있는 요원들을 위한 ‘팁’ 모음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문건은 공개 당시 전 세계적인 화제였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접해봤겠지만 잊어버리셨을 수도 있어 그 내용을 여기서 일부 복기해본다. 5)번이 특히 재미있다.

1) 이 매뉴얼의 핵심은 “목적을 가진 채 어리석게 행동하기(purposeful stupidity)”다. 즉 특별히 뭔가를 훔치거나 폭파하거나 심지어 주요 인물을 납치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조직에 녹아들어 시간을 지연시키고 능률을 떨어트리는 작업을 반복해서 벌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방해 공작을 펼치는 것이 된다.

2) 생산 시설에 침투했다면 : 절단과 관련된 도구들은 틈틈이 무디게 만들어 생산성을 떨어트리라. 톱은 쓰지 않고 놔둘 때 살짝 비틀어서 보관하라. 그러면 누군가 사용할 때 쉽게 부러진다. 줄을 사용할 땐 빨리 문질러서 날이 빨리 닳게 하라. 무겁게 압력을 주고 천천히 사용해도 마찬가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도구 청소를 할 땐 벽, 책상, 바이스 등에 힘껏 두드려 먼지를 털라. 도구가 쉽게 부러진다.

3) 교통 시설에서 일하게 됐다면 : 중요 인물의 이동을 최대한 방해하라. 기차나 버스의 표를 끊을 땐 행선지를 일부러 틀리게 하거나 중간 지점까지만 가도록 한다. 가능하면 두세 사람에게 같은 자리의 표를 주라. 그러면 싸움이 날 수 있다. 기차 시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노출시키라. 길이나 터미널 입구 방향을 물어보면 반대 방향을 알려준다. 음식은 최대한 형편없이 제공하고, 짐을 빼돌려 골치가 아프게 하라.

4) 적의 자동차에 접근할 수 있다면 : 도로에 뾰족하거나 거친 사물들을 뿌려두라. 주차할 땐 자동차 내부등을 켜 두어서 배터리가 빨리 닳게 한다. 윤활유나 엔진오일을 최대한 적게 주입하고 교체 주기를 잊어버리라. 타이어를 약하게 만드는 물질로는 작은 유리 조각, 벤진 오일, 가성 소다 등이 있다. 이런 물질을 타이어가 접촉할 수 있도록 하라.

5) 일반 기업 및 사무 환경에서는 : 반드시 ‘절차’를 거치게 하라. 절대로 들어온 요청이나 요구를 한 번에 들어주지 말라. 최대한 말을 많이, 자주 하라. 한 번 말하면 길게 해서 요점을 놓치게 하라. 길고 쓸데없는 비유를 동원하고 ‘연구와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말을 군데 군데 덧붙여 나중에 말할 기회를 많이 만들라.

사사건건 윗사람에게 보고하라. 작은 일들 하나하나 윗사람들이 처리하도록 만들면 진짜 중요한 일의 처리가 지연된다. 회의를 자주 열고, 지난 회의에 나왔던 내용을 복기하라. 결정된 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최대한 물고 늘어져 논쟁거리를 삼아라. 이때 말꼬리를 잡거나, 1~2분 회의에 늦게 오거나, 앉아있는 태도 등을 걸고 넘어져라. 하지만 어느 정도 논리와 타당성은 유지해야 한다.

6) 일반 기업의 관리자급이라면 : 구두 보고를 절대 받지 말고 반드시 규격과 양식에 맞는 서면 보고만을 요구하라. 아랫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윗사람의 명령은 잘못 이해하라. 마감일은 항상 최대한도로 연기하라. 업무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미리 구비하지 말고 항상 바닥이 나서 일을 못하게 되어서야 구입하라. 결과물의 질을 위한 답시고 반드시 비싸고 귀해서 구하기 힘든 재료를 주문하라. 일을 시킬 때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순서대로 시켜야 한다. 모든 일에 완벽주의자가 돼서 ‘완료’가 되지 않도록 한다. 새내기를 교육시켜야 한다면 잘못된 요령을 가르쳐준다. 진짜 일을 해야 할 때마다 회의를 소집하라. 또한 서류작업을 최대한 많이 시킨다.

7) 일반 직원이라면 : 업무 속도는 최대한 느리게 하고, 상사의 지시는 마치 외국어 듣듯 하라. 이해하기 힘들다고 반복 설명을 요청하라. 일의 결과물은 항상 질이 낮게 하고, 도구를 탓하라. 자기만 알고 있는 요령이나 팁이 있어도 동료들과 공유하지 말라. 관리자의 요구는 되도록 무시하고, 일반 직원들의 어려움을 대변한다며 항상 조직적인 문젯거리를 만들고 틈틈이 시위하라. 재료, 도구, 물품을 관리할 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섞어서 보관한다. 설명은 되도록 길게 한다. 사사건건 울되 크고 히스테릭하게 울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업무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하라.

어떤 부분에서는 스스로가 심하게 찔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동안 스쳐지나온 몇몇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비유까지 들어가며 한 길고 긴 설명이 사보타주에 해당하는 일이었다니, 그 동안 빠르게 일을 그만 두고 기자하고는 영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는 전직 부사수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 당신들의 경력을 제가 사보타주했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자는 2017년 최악의 직업 중 하나로 꼽혔어요.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옆에 아슬아슬 버티고 있는 후배가 한 명 있…

1944년에는 기밀이었던 문건이 전체 공개 문건으로 변환된 것이 2008년, 64년만의 일이다. 작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과 ISIS 등의 사이버 활동 증가로 인해 국가 간 사이버전이 격화된 것이 요 근래인데, 2080년 즈음에는 어떤 문건이 공개될까? 그 궁금함의 해소 시간을 앞당겨 주는 게 위키리크스인 걸까? 줄리안(위키리크스 운영자), 당신은 고자질쟁이가 아니라 시간 단축자였어…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what?’이 아니라 ‘still?(아직도?)’이라고 생각한다. 64년 전 문건을 보는데도 나의 어떤 행동이나 주변의 누군가들이 떠오른다는 것은 아직도 그때의 그 공격 방법들이 유효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마땅한 대처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며, 결국 일정 부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는 뜻이다. 2080년 즈음 공개되는 내용들 역시 아직도 해결 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잠언 취급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제자리걸음의 방증이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위키리크스의 각종 정보 공개 노력은 그저 모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거나 일반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64년의 시간을 앞당겨 발전이라든가 향상이라든가 개선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미리 도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위키리크스의 하는 일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말이다. 언젠가, 언젠가, 라고만 하다가, 위키리크스가 내건 문건에 찬성과 반대만 나눠서 외치다가, 우린 64년 후에도 윈도우 XP 패치하라는 칼럼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그건 좀 한심하다. 하루하루가 의미를 누적시키지 않는다면, 장기 계획이나 미래의 희망이라는 건 절망의 유예밖에 되지 않는다.

그밖에도 이 주옥같은 지혜를 읽어보고 싶다면 여기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물론 영문이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CleanedUOSSSimpleSabotage_sm.pdf

[출처] http://www.boannews.com/media/view.asp?idx=56769&mkind=1&kin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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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2017년 9월 4일 by comphy in category "사회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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