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국문학] [이순일과 심순애] 

통권 : 39 / 년월 : 2013년 5,6월

 『장한몽』의 탄생과 운명

 

통권 : 39 / 년월 : 2013년 5,6월 / 조회수 : 3744
『장한몽』의 탄생과 운명
 

 

 때는 음력 삼월 십사일 봄밤이요 장소는 빼어난 경치로 이름난 대동강변이다. 평양 팔경 가운데 으뜸이 부벽루 달구경이라 했건만 달빛 아래 청춘 남녀 한 쌍의 그림자는 험악하기 그지없다. 쓰러져 흐느끼던 여자가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보지만 남자는 매몰차게 뿌리치며 발길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학생모를 쓰고 까만 교복을 걸친 청년은 급기야 여자의 허리께에 함부로 구둣발을 내지른다. 지지리 못난 남자는 그래 놓고도 여자 마음 하나 얻지 못해 끝내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매혹된 심순애, 연인에게 경멸과 저주를 퍼붓고 떠난 이수일의 이야기다. 지금부터 꼭 백 년 전 봄밤에 벌어진 이 사건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 두고두고 유전된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대동강을 내려다보는 보름달을 걸고 이날 이 순간을 한평생 잊지 않겠노라 부르짖은 통한의 맹세가 비단 두 사람의 가슴만 후벼 파고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에 지치고 이별의 아픔에 몸부림칠 때마다 청춘 남녀의 쓰리고 아린 한을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 온 이야기가 바로『장한몽』이다.
 식민지 시기 초입에 등장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는 1970~1980년대까지 폭넓게 향유되었다. 한국전쟁 무렵에 태어난 세대라면 신상옥 감독의 영화나 은방울 자매의 노래를 금세 떠올림 직하다. 아마 신성일과 윤정희의 바닷가 이별 장면이 어렴풋이 되살아나거나 트로트 한 마디쯤 입가에 맴돌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당장 텔레비전만 켜도 숱한 이수일, 심순애, 김중배를 만날 수 있다. 흔하디흔한 드라마의 주제가 곧 남녀 간의 삼각관계 아닌가? 가난하지만 순정을 바친 청년, 돈 많고 능력 있는 경쟁자, 사랑에 흔들리는 여심이야말로 너무 빤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사랑과 이별이란 어느 시대에나 세계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변함없는 숙제이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장한몽』이 대중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다양하게 변주된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된 것은 그런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하나의 이야기가 백 년 동안이나 살아남았다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이야기도『장한몽』만큼 오래도록,『장한몽』만큼 생생하게 활력을 이어 온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 고전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은 두말할 여지도 없거니와 대중소설이나 대중문화 현상 가운데 어느 것도『장한몽』만큼 즐겨 찾고 또한 강렬하게 각인된 사례가 없다. 물론 정규 교육 과정의 교과서에서 다루어진다든가 하는 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왜색 신파로 지목되거나 한국인의 건전한 비판 의식을 압살한 첨병으로 비난받아 왔을 따름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따지고 보자면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는 본디 한국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장한몽』은 일본의 인기 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한국식으로 바꾼 번안소설이다. 이를테면 아타미 해변의 소나무 아래에서 이별한 간이치와 미야가 대동강변 부벽루의 이수일과 심순애로 둔갑한 것이다. 황금 두억시니라는 뜻을 가진 제목은 깊이 사무쳐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오자키 고요의 소설은 일본 아동문학의 선구자인 이와야 사자나미(嚴谷小波)가 겪은 실연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알려져서 한때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기실『곤지키야샤』도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의 원작은 아니다. 미국 여성 작가 버사 클레이(Bertha M. Clay)의『여자보다 약한 자(Weaker Than a Woman)』라는 인기소설을 일본식으로 번안한 것이『곤지키야샤』이니 말이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떠돌아다닌 전 세계적인 이야기가 바로 조중환의『장한몽』이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운명이 한국인의 이야기로 태어난 것은 꼭 백 년 전인 1913년 5월의 일이다.『장한몽』은 당대 유일의 한국어 중앙 일간지에 절찬리에 연재되자마자 곧장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해에 전 3권으로 출판된『장한몽』은 1930년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8판 이상을 돌파했으니 동시대의 이광수 소설『무정』을 능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장한몽』의 인기는 해방 후에도 쭉 이어졌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의 생명력을 부활시킨 공적은 일명 딱지본이라 불린 싸구려 책의 몫이다. 값싼 납 활자로 대량 인쇄된 딱지본은 독특한 표지 디자인과 판형, 얄팍한 분량, 저렴한 가격을 내세웠는데, 서점뿐만 아니라 시내 좌판에 내놓거나 봇짐을 지고 다니면서 팔기도 해서 널리 유통되었다.『장한몽』은 1952년과 1956년에 종로 3가의 세창서관, 1956년과 1961년에 서울의 영화출판사, 1964년과 1978년에 대구의 향민사에서 꾸준히 출판되었으니, 해방 후의 대표적인 딱지본 출판사 세 곳을 모두 거친 드문 이력을 가졌다. 딱지본『장한몽』은 1910년대의『장한몽』을 되살려 놓기도 했지만 때로는 1950년대식으로, 때로는 1970년대식으로 새로운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를 재창조해냈다. 특히 1974년과 1978년에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허문영이『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목을 붙여 새로운 시대감각과 상상력에 걸맞게 다시 번안할 정도로 끊임없이 고쳐 쓰고 다시 읽는 소설로 거듭났다.
 『장한몽』의 폭발적인 인기는 1913년에 처음 등장할 때 대중가요와 연극 열풍을 휘몰고 왔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수일과 심순애 노래는 일본에서 학교 교가를 빌려 엔카(演歌·えんか )로 부른 영화 주제가에서 유래했다. 초창기 유행가의 출발점이 된 번안가요 <장한몽가>는 한국에서도 연극과 영화 주제가로 채용되어 선풍을 일으켰다. 1921년에 발표된 소파 방정환의 소설『그날 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최영식과 허정숙에 맞춰 <장한몽가> 가사를 바꿔 부르는 대목을 보면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1920년부터 널리 불리기 시작한 이수일과 심순애 노래의 효시는 10절이나 되는 김산월의 <장한몽가>인데, 1927년에 도월색, 1931년에는 고복수와 황금심의 <장한몽가>가 큰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수일과 심순애 노래가 1920년대 후반부터 유성기 음반과 라디오 방송이라는 첨단 미디어를 타고 이야기와 가요를 넘어 방송극, 만담, 만극, 창극, 소리극, 영화극, 난센스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서월영과 복혜숙, 도무와 이리안, 심영과 한은진, 지경순과 박세명과 같은 인기 연예인이 등장한 것도 <장한몽가>를 통해서다. 또 193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끈 서도소리는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를 긴 사설로 담아냈다. 이은관, 유지숙, 이영렬, 오복녀와 같은 일급의 소리꾼이 부른 이수일과 심순애 노래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사정이 그렇고 보면 남인수나 은방울 자매가 리메이크한 노래가 인기를 끈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10년대의 신파극 열기에 불을 붙인 장본인도『장한몽』이다. 한창『장한몽』이 신문에 연재되는 와중에 벌써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의 전반부가 무대에서 개막되어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여러 극단에서 앞 다투어 공연한『장한몽』은 식민지 시기에 이십여 차례 이상 흥행에 성공했으며, 즉흥극이나 막간극으로도 단골 레퍼토리였다. 만담가, 변사, 성우, 가수에 의해 변조되거나 희화화된 연예 형태까지 감안하면 일일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신파극으로서『장한몽』은 해방 후에 몇몇 유랑 극단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지만, 여전히 시민단체나 지방 극단의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왔다.

 그뿐이 아니다.『장한몽』은 1978년 극단 가교의 성공적인 공연, 1979년 천막 극장 연극 잔치, 1981년 제삼 세계 연극제와 같이 굵직한 무대를 거치며 악극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극단에서 소극장 공연으로, 악극으로, 때로는 변형된 가극으로『장한몽』을 무대에 올리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예컨대 1988년에 처음 기획된 <순애 내 사랑>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최근까지 순회공연 형태로 이어졌다. 독특한 연쇄극 형식이자 무성영화 변사극이라 이름 붙은 퓨전극 <순애 내 사랑>의 인기는 복고 취향이나 낡은 향수 덕분만이 아닐 터다. 사실『장한몽』이 발휘한 역동적인 실험성에 톡톡히 한몫한 것이 바로 연쇄극과 영화이기 때문이다.
『장한몽』이 제7의 예술로 급부상한 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인데, 처음에는 연쇄극이라는 형식을 빌렸다. 활동사진극이나 키노드라마라고도 불린 연쇄극은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 배경이나 활극 연기를 미리 영화로 찍은 뒤 연극 상연 중에 스크린에 영사하는 연출 방법이다. 1920년에 제작된 연쇄극『장한몽』에는 최초의 여배우 마호정이 출연하고 스크린 뒤에서 주제가인 <장한몽가>를 불렀다. 1928년에 나운규는 단성사 무대 위에서『장한몽』 영화 촬영 상황을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준 모의 촬영이라는 독특한 복합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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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영화로는 조중환이 직접 영화사를 설립해 제작한 것이 처음이다. 1926년에 단성사에서 개봉된 흑백 무성영화『장한몽』에는 나운규와 심훈이 출연했다. 또 1931년에 이구영 감독이 처음으로 이동 촬영 기법을 도입하여『수일과 순애』를 영화화했다.『장한몽』은 1960년대에 두 차례 제작되었다. 1965년에 세기극장에서 개봉된 김달웅 감독의『이수일과 심순애』에서는 신성일과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다. 1969년에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장한몽』은 조중환의 번안소설에 가장 충실한데, 신성일, 윤정희, 남궁원, 한은진, 도금봉, 사미자와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급 배우가 총출연했다. 장르나 양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격과 실험성 강한 도전이 유독『장한몽』을 통해 이어졌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지나온 편력과 운명을 다시 한 번 음미하게 해 준다.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일 법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유전되면서 광범위하게 소비된 현상은 분명 놀랍다. 애초에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와 번안소설로 탄생한『장한몽』은 저곳의 이야기에서 이곳의 이야기로, 그때의 이야기에서 지금의 이야기로, 아예 이야기를 넘어 가요, 연극, 악극, 영화로 탈바꿈되었다. 또 이야기가 책으로, 책에서 상품으로, 문학을 벗어나 문화로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그러면서도 앞선 이야기를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미디어와 다양한 갈래를 모색하면서 스스로 갱신되어 왔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한국인의 대중적인 정서와 감수성을 줄기차게 자극해 온 저력은 시대와 세태의 변화에 따라 갖가지 장르와 양식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단련되고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장한몽』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색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참신한 맵시로 출현하곤 했으며, 짐작컨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지금으로서는 예견하기 힘든 첨단의 미디어를 발굴해 새로운 적응 능력을 발휘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 양식을 개척해 갈지도 알 수 없다.




#저자 약력
朴珍英 1972년 서울생. 연세대 비교사회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최근 저서 『장한몽』, 『번안소설어 사전』, 『신문관 번역소설 전집』, 『번역과 번안의 시대』,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등.
bookgram@naver.com

#주석
이미지 제공_필자, 인천한국근대문학관, 창작극희

 

[출처] http://platform.ifac.or.kr/webzine/view.php?cat=2&sq=1086&page=&mod=last&Q=&S=&s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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