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

유엔 연설서 “너희 나라는 망한다”…독설 퍼부은 그들의 최후

유엔 연설서 “너희 나라는 망한다”…독설 퍼부은 그들의 최후

[중앙일보] 입력 2020.09.26 14:50   수정 2020.09.26 19:37

국제연합(유엔·UN)이 9월 24일로 창설 75주년을 맞았다. 1945년 51개국으로 출발했던 유엔은 현재 193개의 회원국과 바티칸·팔레스타인의 2개 옵서버 회원국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이자 다자외교의 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75년 전인 45년 9월24일 유엔 창설
대한민국 건국, 6·25 유엔군 참전
다자외교 장으로 3차대전 막아
올해 화상연설, 트럼프만 직접 나서
60년 자유 거론에 소련서기장 발끈
카스트로, 4시간29분 반미·반전 열변
아라파트, 올리브와 총 중 택일 요구
차베스, “유황냄새” 부시 악마로 표현
전통의상 가다피, 미 비난 탈레반 옹호
유엔총회서 기염 토했지만 내치 무너져
다양한 국제사회의 무정부성 보여줘
라말라·툰베리 유엔본부 연설 감동적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당시 44세의 케네디를 애송이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켜 미국에 도전했다. [중앙포토]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당시 44세의 케네디를 애송이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켜 미국에 도전했다. [중앙포토]

유엔이 지난 9월 24일로 창설 75주년을 맞았다.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지난 23일 제75차 유엔총회의 부속행사로 열린 유엔 보건안보우호국 그룹 고위급회의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에 처한 미래세대를 위한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외교부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 캡처]

유엔이 지난 9월 24일로 창설 75주년을 맞았다.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지난 23일 제75차 유엔총회의 부속행사로 열린 유엔 보건안보우호국 그룹 고위급회의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에 처한 미래세대를 위한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외교부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 캡처]

 

유엔 창설 75주년, 첫 화상 총회 연설

유엔은 유엔총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사무국, 유엔 경제사회 이사회, 국제 법원 등으로 이뤄졌다. 이 중에서 유엔총회는 모든 회원국이 참가해 의안을 심의하고 토론을 진행한다. 유엔총회는 매년 9~12월에 열린다. 올해는 9월 15일에 개막했으며 22일부터 회원국 정상과 수석대표가 참가하는 일반토의가 진행 중이다. 유엔총회 연설로 불리는 행사다. 올해 열린 제75차 유엔총회에선 코로나 19 때문에 정상 연설이 모두 사전 녹화돼 유엔본부의 총회장에서 화면으로 제공됐다. 올해는 미국까지 갈 필요가 없어 각국 정상들이 부담 없이 연설에 나설 수 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총회 녹화 연설은 한국시각 15일 녹화돼 23일 오전 1시 26분에 시작해 42분까지 총회장에서 상영됐다. 
재미난 것은 유엔총회에서 이뤄진 국가원수나 정부 수반의 연설에선 갖가지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국제관계학·국제정치학에서 국제사회를 동일한 규범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무정부 상태’로 전제하고 개별 국가는 국익을 위해 투쟁한다고 보는데 유엔총회 연설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구두로 탁자를 치우고, 특정 국가나 지도자를 “악마”라고 증오하며, “너희는 망할 것”이라고 저주하기도 했다. 24일로 창설 75주년을 맞는 유엔에서 열린 기막힌 총회 연설을 반추해본다.  

1960년 제15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이날 흐루쇼프는 필리핀 대표가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의 자유와 인권 문제르 거론한 것에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의 연설 도중 구두를 벗어 탁자를 쳤다. [중앙포토]

1960년 제15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이날 흐루쇼프는 필리핀 대표가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의 자유와 인권 문제르 거론한 것에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의 연설 도중 구두를 벗어 탁자를 쳤다. [중앙포토]

 

소련 흐루쇼프, 구두 벗어 탁자 치며 호통

유엔 역사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총회 연설을 한 인물을 꼽으라면 1960년 연단에 올랐던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일 것이다. 그는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다 구두를 벗어 탁자를 치는 해프닝을 벌였다. 예의나 품위,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그의 무례하고 공격적인 행동은 전 세계에 흐루쇼프 개인을 넘어 소련이라는 나라, 그리고 공산체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각인됐다.  
앞서 필리핀의 대표가 연설하면서 소련과 당시 소련의 위성국이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자유 억압과 인권 침해를 비난한 것이 원인이었다. 흐루쇼프는 “총 한 방 안 쏘고 미국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미국과 자유 세계에 대한 증오와 원한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저주는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흐루쇼프는 그 기세등등했던 유엔총회 연설을 한 지 4년 뒤인 1964년 10월 소련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원회의 궁정 반란으로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연금 생활자로 여생을 보냈다. 흐루쇼프를 몰아낸 핵심은 그가 키우다시피 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맡았으며 그의 시대에 소련의 체제 모순은 더욱 곪아 극에 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제15차 유엔총회에서 만난 니키타 흐류쇼프 소련공산당 제1서기(오른쪽)이 무장 혁명으로 집권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0년 제15차 유엔총회에서 만난 니키타 흐류쇼프 소련공산당 제1서기(오른쪽)이 무장 혁명으로 집권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4년 뒤 흐루쇼프 몰락, 30년 뒤 소련 붕괴

미국에 맞서며 냉전의 한 축을 형성했던 소련도 흐루쇼프의 유엔총회 연설 30년 뒤인 1991년 12월 해체돼 사라졌다. 그야말로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카드로 만든 집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소련을 무너뜨린 건 총이나 탱크, 핵무기나 미사일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공산체제의 자체 모순으로 경제가 지지부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의 하나였다. 특히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가게마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진풍경이 벌어졌다. 수요공급의 법칙을 무시하고 국가가 가격과 공급을 직접 통제하는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체제 모순의 현장이었다.  
자유를 억압당하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끌려가서 인권침해를 당하는 체제에서는 누구도 문제를 지적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수 없었다. 결국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추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소련은 쿠데타가 발생했다 진압되는 등 혼란을 겪다가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흐루쇼프의 유엔총회 탁자 연설은 자신이, 국가가, 체제가 안으로 곪아 터지는 것을 모른 채 무너지는 절벽 위에서 큰소리를 치는 행동의 상징이 됐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국아평의회 의장이 1960년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국아평의회 의장이 1960년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쿠바 카스트로, 4시간 29분 연설로 최장

같은 1960년 유엔총회에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평의회 의장은 무려 4시간 29분간 연설하며 최장 연설의 기록을 세웠다. 카스트로는 2008년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은퇴할 때까지 권좌를 지키면서 자국 내에서 수시로 이처럼 장시간 연설을 했다.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 수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몇 시간씩 열변을 토하기 일쑤였다.  
쿠바혁명을 일으켜 1959년 정권을 잡은 카스트로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혁명과 자신을 선전하고 미국과 서방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무식하고 무례”하다고 맹비난했다.  
카스트로는 1960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장시간에 걸쳐 설명했으며 특히 전쟁과 군비경쟁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전쟁이 미개발 국가와 그 나라의 자원을 독점화한다고 주장하면서 군비경쟁을 비난했다. 군비경쟁은 독점 자본가들에게 큰 이익이 되며, 그들은 전쟁으로 발생한 시체들을 먹어치우는 까마귀와 같다고 비유했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 정책도 맹비난했다. 또 자신이 유엔에 오려다 미국의 방해로 항공기가 압류되면서 아바나로 돌아갔으며 흐루쇼프가 제공한 다른 비행기로 간신히 도착했다고 말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중앙포토]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중앙포토]

참석 과정에서 소련 지원받고 친소로

카스트로가 이러한 유엔총회 연설을 한 지 불과 넉 달 뒤인 1961년 1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임기 종료 직전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카스트로가 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포함한 외국 자산을 몰수하는 바람에 생긴 갈등이 큰 원인이었다.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1961년 1월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석 달 뒤인 4월 쿠바 피그스만 침공을 지시했다. 쿠바 망명자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실행한 피그스만 침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카스트로는 급속히 소련과 가까워졌으며 쿠바는 본격적으로 친소국가가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1962년 10월 흐루쇼프가 쿠바에 단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수송선을 보내는 것이 미국의 U-2 정찰기에 포착되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인류가 가장 핵전쟁에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 평가받는 사태다. 이 사태는 케네디가 소련과 접경한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뒤로 물리는 조건으로 흐루쇼프가 핵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선박을 회항시키면서 끝났다.  
그 뒤 쿠바는 미국의 제재 아래 소련의 지원으로 경제를 유지했지만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결국 쿠바는 2015년 7월 20일 미국에 상주하던 이익대표부를 대사관으로 격상하면서 미국과 국교 정상화를 이뤘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때였다. 피델 카스트로 의장은 이듬해 1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중앙포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중앙포토]

테러단체 지정 PLO 아라파트도 연설 

1974년 유엔총회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비회원국 수뇌로는 처음 연설하는 기회를 얻었다. 아랍권의 요청과 팔레스타인에 동정적인 여론에 힘입었다. PLO는 1964년 팔레스타인 독립국 설립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민간항공기 납치를 비롯한 숱한 테러 행위로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테러 지원단체로 지목됐다. 1972년 뮌헨 여름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납치해 전원 살해한 검은 9월단도 PLO의 분파 조직이다. PLO에 대한 테러단체 지정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과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 해결을 추구하면서 1991년 해제됐다.  

1969~200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을 맡았던 야세르 아라파트.[중앙포토]

1969~200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을 맡았던 야세르 아라파트.[중앙포토]

아라파트는 1969년 PLO의 3대 의장을 맡아 20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간 자리를 지켰다. 이 과정에서 PLO를 사유화하고, 지원금 모금과 집행을 불투명하게 처리했으며, 자신과 부인이 사치 생활을 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라파트는 총회 연설에서 “나는 평화의 올리브 가지와 자유 전사의 총을 모두 손에 들고 있다”며 “내가 올리브 가지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연설했다. 평화와 전쟁 중 택일을 요구하는 압박일 수도 있고, 간청일 수도 있는 내용이다. 이 연설이 이뤄진 1974년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로부터 자결권을 인정받고 유엔 옵서버 자격을 얻었다. 팔레스타인은 자치정부를 구성했지만, 현재 가자지구를 지배하는 하마스와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티로 양분됐다. 가자지구에선 이스라엘군이 철군했지만 사실상 봉쇄된 상태다.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이 사실상 점령하고 있다. 여러 곳에 크고 작은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됐으며, 이스라엘은 이를 국제적으로 자국 영토화로 인정받으려고 시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은 아직도 요원하다. 중동평화는 팔레스타인 외에 시리아나 예멘 등 다른 아랍국가와 이슬람국가(IS) 같은 테러단체 등의 변수로 아직도 요원한 상태다. 최근 아랍국가인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수교하면서 중동의 외교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잊혀간다는 평가도 있다.  

2006년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며 미국의 비파적 지식인 놈 촘스키의 저서를 들어보이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막대한 석유 수익금을 바탕으로 '21세기 사회주의'를 시험했다. [중앙포토]

2006년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며 미국의 비파적 지식인 놈 촘스키의 저서를 들어보이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막대한 석유 수익금을 바탕으로 ’21세기 사회주의’를 시험했다. [중앙포토]

베네수엘라 차베스, 부시를 악마로 표현

2006년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앞서 연설했던 연단에 서서 “유황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기독교나 유럽 문명권에서는 악마에게 지옥의 유황불 냄새가 난다고 여긴다. 부시 미 대통령을 ‘악마’로 표현한 셈이다. 차베스는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연대를 확인하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추구하다 2013년 암으로 숨졌다.  
베네수엘라는 이러한 포퓰리즘 정책의 후유증으로 2012년 차베스 집권 말기부터 후임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집권 중인 현재까지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경제가 석유에 의존하다 보니 세계적인 저유가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으며, 지도자들의 만성적인 부패, 경쟁력 저하, 국가 지원 의존증의 심화 등으로 원인으로 지목된다. 베네수엘라는 현재 살인적인 인플레 등으로 경제가 국가부도 수준이다. 경제 침체가 장기화하다 보니 사회도 불안해 범죄율이 높고 치안이 불안하다. 이런 와중에 마두로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자유 언론을 억압하고 장기 집권에 나서고 있다. 경제와 사회, 정치 불안이 심화하면서 수백만의 국민이 이웃 나라로 이주했다.  

2009년 2월 에피오피아에 열린 제12차 아프리카 단결기구 총회에 참석한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 지도자의 모습. 베두인족 전통의상 차람이다. 이 회의애서 가다피는 잌기 1년의 아프리카 단결기구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그해 6~7월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총회를 열었다. 사진=미국 해군

2009년 2월 에피오피아에 열린 제12차 아프리카 단결기구 총회에 참석한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 지도자의 모습. 베두인족 전통의상 차람이다. 이 회의애서 가다피는 잌기 1년의 아프리카 단결기구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그해 6~7월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총회를 열었다. 사진=미국 해군

 

카다피, 베두인족 의상 입고 반미 연설

무아마르 카다피가 유엔총회에서 연설한 2009년 9월, 유엔 사무국은 연단을 대대적으로 청소해야 했다. 카다피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의 치렁치렁한 갈색 전통 의상에 검은색 베레모를 쓰고 나타났다. 1999년 대령 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을 대령으로 부르며 군복을 즐겨 입었지만 1990년 이후에는 주로 베두인 전통의상을 입고 베레모를 쓰고 다녔다.  
이날 카다피는 1시간 36분에 걸쳐 여러 문제를 산만하게 거론하며 연설을 이어갔다. 그가 지루한 연설을 계속하는 동안 앞에 앉아있던 각국 참석자들은 썰물 빠지듯 나가 버렸다.  
카다피는 유엔헌장 사본을 하나 들고나와 찢으면서 “나는 이 문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유엔총회 연설을 하면서 유엔의 설립 목적과 권위를 대놓고 부인하며 모욕을 가한 셈이다. 이날 늦게 유엔총회 연설을 한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나는 유엔헌장을 재확인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지, 찢으려고 나온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카다피는 연설에서 미국이 수많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이라크에서 벌어진 대량살상을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세력의 이슬람 군주국 수립은 지지했다. 미국이 벌였던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난한 것이다.  
카다피는 이 연설을 한 지 2년 뒤인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민중봉기로 정권을 잃고 자신은 숨어있던 도랑에서 반대파에 발각돼 잡혀가다가 한 청년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살해됐다. 시신은 푸줏간 냉장창고에 보관됐다. 당시 시작된 리비아 내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2014년 선거 과정의 분란으로 나라가 동서로 쪼개졌으며, 3~4개의 정부가 대립하고 있다. 인구 630만의 리비아에선 현재 200개가 넘는 군벌과 정파가 난립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리 녹화한 총회 연설이 지난 22일 제75차 유엔총회장에서 나오고 있다. 올해는 유엔 사상 처음으로 정상과 대표 연설이 화상으로 진행된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리 녹화한 총회 연설이 지난 22일 제75차 유엔총회장에서 나오고 있다. 올해는 유엔 사상 처음으로 정상과 대표 연설이 화상으로 진행된다. AFP=연합뉴스

 

국제사회 다양성·무정 부성 반영  

흐루쇼프·카스트로·아라파트·차베스·카다피의 독특한 연설은 유엔총회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평가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타인이나 다른 나라에 대한 배려나 예의가 없다는 점에서 격을 떨어뜨렸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국제사회에선 이런 나라도 있고, 저런 지도자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정부 상태인 국제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스펙트럼이 넓은 유엔총회 연설은 유엔이 실질적으로 큰 힘을 가진 기관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느슨하게 연결된 국제기구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 일부에서 정상들의 유엔총회 연설을 정치 연설, ‘독백 같은 웅변’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4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것이 연설문을 보여주는 프롬프터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화상연설로 대신하면서 북한에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4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것이 연설문을 보여주는 프롬프터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화상연설로 대신하면서 북한에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중앙포토]

 

김정은 위원장 유엔총회 연설 왜 못하나

이런 상황에서 각국 지도자의 유엔총회 연설은 국제사회를 이끌고 바꾸는 의제 설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부 정치용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가원수나 정부 수반의 유엔총회 연설은 별다른 관심도 없이 지나간다. 연설문 작성자나 이를 읽으며 연설을 한 당사자에겐 힘들고 긴장되며, 때로는 자랑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내용을 멋진 문장에 담은 유엔총회 연설문은 실제로는 상징적일 뿐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사전 녹화해 뉴욕 유엔본부의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총회장에서 튼 것도 11월 3일의 선거를 염두에 둔 ‘내부 정치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유엔의 존엄성과 가치,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 다자외교의 중요성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엔이 이처럼 열린 기관이고 총회 연설의 성격이 이렇기 때문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얼마든지 유엔총회에 나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연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보고 전략을 수정할 수도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9년 9월 유엔본부에서 유엔본부에서 환경운동가 그레다 툰베리(왼쪽에서 둘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을 쏘아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9월 유엔본부에서 유엔본부에서 환경운동가 그레다 툰베리(왼쪽에서 둘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을 쏘아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여성교육 말라라, 기후변화 턴베리 초점

국제 지도자로 인정받는 길은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게 아니라 책임 있고 합리적인 다자외교의 장에서 실질적으로 국제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여성교육 및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수프자이. [사진제공=문학동네]

파키스탄의 여성교육 및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수프자이. [사진제공=문학동네]

이런 상황에서 국가지도자가 아닌 자신의 과제를 실천하는 몇몇 개인이 유엔본부에서 한 연설 들은 유엔총회 연설보다 더욱 주목받는다. 여성교육 운동가로 15세 때인 2015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말라라 유수프 자니 가 2013년 7월 유엔본부에서 교육 접근성을 역설했던 연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019년 9월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세계 정상들을 비판한 크레타 턴베리의 연설도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 있다.  

2019년 9월 23일 유엔본부에서 각국 정상과 산업계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한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스웨덴의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가 분노한 표정으로 연설하고 있다.[EPA=연합뉴스]

2019년 9월 23일 유엔본부에서 각국 정상과 산업계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한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스웨덴의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가 분노한 표정으로 연설하고 있다.[EPA=연합뉴스]

결국 유엔 연설에서 중요한 것은 고루한 답습이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혁신적인 사고, 아집 대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소통력, 그리고 선악을 구분하며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합리성일 것이다. 혁신·소통·합리는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고 평화와 자유·인권을 추구하는 유엔의 가치를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881752?cloc=joongang-home-toptype1basic#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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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

[윤석만의 인간의 삶을 묻다] 15세기 유럽 전체보다 GDP 많던 중국이 신대륙 발견했다면

15세기 유럽 전체보다 GDP 많던 중국이 신대륙 발견했다면

[중앙일보] 입력 2020.08.16 00:04

정화의 대원정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시 '대항해시대-바람에 실은 바람'특별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중국 명나라 시대의 대항해가인 정화(1371~1433년)가 이끈 보선 함대 모형을 구경하고 있다.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시 ‘대항해시대-바람에 실은 바람’특별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중국 명나라 시대의 대항해가인 정화(1371~1433년)가 이끈 보선 함대 모형을 구경하고 있다.

등장인물
정화

정화

정화
(1371~1433). 본명은 마화(馬和)이나 영락제로부터 정씨를 하사받고 개명했다. 남서부 윈난성 출신 색목인으로 왕실에 끌려와 환관이 됐다. ‘마’씨는 무하마드의 음차다. 지략이 뛰어나 태감의 자리에 올랐고 7차례 대원정을 이끌었다.

 

15세기 정화의 인도·아프리카 원정
함선 62척에 선원만 2만7800명
당시 중국 GDP, 유럽 30국의 1.4배
자율·다양성 토대 과학혁명 역전

  

영락제

영락제

 영락제
(1360~1424).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세계 최대의 궁전인 자금성을 지었다. 환관, 이민족 등 신분에 관계없이 요직에 중용해 정통 관료들과 마찰을 빚었지만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대원정 같은 대담한 정책을 폈다.

조지프 니덤

조지프 니덤

조지프 니덤
(1900~1995).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니덤이 제자들과 함께 쓴 7권 25책의 역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15세기 이전까지 중국이 세계적 과학기술강국이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밝혀 서구우월주의를 깨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앵거스 매디슨

앵거스 매디슨

앵거스 매디슨
(1926~2010). 2000년간 세계 경제사를 연구한 영국의 경제사학자. OECD 초대 경제개발부국장을 지낸 뒤 네덜란드 흐로닝언대학 교수로 일했다. 『매디슨 프로젝트』는 기원후 전 세계 국가의 경제 흥망사를 다룬 방대한 연구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鄭和)였더라면. 지금처럼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이거나 할리우드가 세계 대중문화의 표본이 아닐 수 있죠. 정화의 대원정 후에도 명(明)이 해양 정책을 지속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1405년 정화는 영락제의 지시로 첫 항해에 나섰습니다. 1430년까지 7차례 원정을 떠나 인도의 캘리컷,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아프리카 동안까지 다녀왔죠. 국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화가 귀국할 때는 아프리카 왕들로부터 사자·표범·기린 같은 조공을 받기도 했고요.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명사(明史)』에 따르면 정화의 함선 중 가장 큰 것은 길이 44장(丈·132m), 폭 18장(54m)에 이르렀습니다. 총 62척의 배에 2만7800명의 선원을 데리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조금 과장이 있었다 해도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길이 18m, 승무원 40여명)보다 훨씬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만일 정화가 아프리카 서안을 돌아 포르투갈의 함선과 마주쳤다면, 혹시나 콜럼버스가 출항했던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 먼저 도착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명이 대항해시대의 주인공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명의 국력은 세계 최강이었고, 근세 이전까지 중국은 한 번도 초강대국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앵거스 매디슨의 『매디슨 프로젝트』에 따르면 서기 1000년 중국의 인구(5900만 명)는 유럽 30개국을 합친 것(2556만 명)보다 많았습니다. 매디슨은 특히 1990년 물가를 기준으로 이 시대의 GDP 규모를 달러로 환산했는데(기어리-카미스 달러) 중국(274억 달러)이 유럽 30개국(109억 달러)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1500년에도 여전히 중국(618억 달러)이 유럽 30개국(441억 달러)을 압도했죠.
 
그러나 16세기 이후 두 문명은 역전됩니다. 1700년 유럽 30개국의 GDP(809억 달러)가 200년간 84% 늘어난 반면, 중국(828억 달러)의 성장률은 34%에 그쳤습니다. 1900년엔 유럽 30개국의 GDP(6739억 달러)가 중국(2181억 달러)의 3배나 됐고요. 50년 후엔 1조3962억 달러와 2449억 달러로 격차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처럼 16세기 이전까지 초일류 강대국이던 중국은 근세에 이르러 왜 병든 용이 됐을까요.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니덤 퍼즐’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저발전 원인을 ‘과학혁명의 부재’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이 중국과 유럽의 운명을 갈랐다”고 말합니다.
 
니덤은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 등 4대 발명품을 만들어낸 중국의 과학기술이 15세기까진 유럽을 앞섰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구의 비약적인 과학혁명을 중국이 따라가지 못했죠. 핵심 원인은 개방정책을 포기하고 쇄국정책으로 돌아선 데 있습니다. 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가 죽으면서 해외 원정사업도 덩달아 폐기됐죠.
  
개방정책 폐기로 과학 발전 더뎌
 
당시 명은 인력·자원이 풍부해 교역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특히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더 많은 군사·외교 자원을 할애하면서 해양정책이 뒷전으로 밀렸죠. 15세기 난징에서 북쪽의 베이징으로 천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니덤은 “중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했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체제와 유교 전통으로 자율과 개방성이 부족했다”고 진단합니다.

1000년간 유럽·중국의 경제규모 변화

1000년간 유럽·중국의 경제규모 변화

반면 유럽은 봉건제가 무너지고 르네상스에서 꽃핀 학문과 예술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신항로 개척으로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며 새로운 기술과 물자를 받아들였죠. 구질서의 해체와 시장의 확대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였고요. 이런 토양 아래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이어지는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은 이를 현실에 적용한 기술의 발전을 견인하며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무기를 발달시켰습니다. 기술과 군사력은 서구의 나라들이 훗날 제국주의로 치닫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죠. 그 때문에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은 종교의 출현 이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근대과학의 탄생』)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중국과 유럽의 사례를 볼 때 과학혁명은 자율과 개방성, 다문화 같은 근대적 요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과학혁명을 위해선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과학과 인간의 가치』)의 말처럼 사상·비판의 자유, 이를 받아들이는 성찰적 지혜가 있어야 과학의 꽃을 피울 수 있죠.
 
같은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이 프랑스·독일을 치고 나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1500년 네 나라의 1인당 GDP는 비슷했지만, 1600년 네덜란드(1381달러)는 프랑스(841달러)·독일(791달러)을 멀찌감치 따돌렸습니다. 1700년엔 2130달러로 프랑스·독일(910달러)의 2배를 넘어섰고요.
 
16·17세기 네덜란드의 급부상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해상 교역에 신경 썼기 때문입니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경작이 어려웠던 네덜란드는 1579년 스페인에 독립선언을 하면서 여러 나라의 인재를 받아들입니다.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온 개신교도 중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과학·예술·학문의 꽃을 피웠습니다.
 
18·19세기 바통을 이어받은 나라가 영국입니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부터 일찌감치 민주주의의 싹을 틔워온 영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기술 혁신을 위해선 창의성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사회 전반에 다양성과 개방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요람인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과학자까지 이념의 덫 씌워 적폐몰이
 
이처럼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성이 있어야 과학이 발전할 수 있고, 과학적 사고가 널리 퍼져 있어야 문명이 진보합니다.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관용과 개방, 다양성의 정신을 존중하며 과학기술을 꽃피우고 선진국이 됐습니다. 눈부신 과학의 성과는 민주적 토양 아래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떤가요. 얼마 전 신성철 KAIST 총장이 정부의 무리한 고발로 20개월간 검찰 수사를 받다 무혐의 처분 됐습니다. 그는 지난 정권에서 임명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문입니다. 처음부터 과학계는 “문재인 정부가 무리하게 적폐로 내몬다”며 반발했습니다. 당시 네이처도 “한국 과학자들이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고 있다”고 지적했고요.
 
2018년 4월 임기 2년을 남기고 사퇴한 임기철 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과기부 차관으로부터 ‘촛불 정권이 들어섰으니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임기를 못 채우고 그만둔 기관장만 12명입니다. 단지 지난 정권의 인사란 이유로 적폐 딱지를 붙여 내쫓는 것은 과거 유럽의 종교박해와 무엇이 다른가요.
 
과학자를 홀대하고, 원전과 같은 과학 정책조차 비과학적 결정을 내리는 풍토에선 기술 발전도, 경제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치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필요합니다. 오직 이성과 논리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다양한 생각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개방적 풍토에서만 창의성과 혁신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은 얼마나 민주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하고 있을까요.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84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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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2020.08.14 00:37

정화의 대원정 

등장인물
정화

정화

정화
(1371~1433). 본명은 마화(馬和)이나 영락제로부터 정씨를 하사받고 개명했다. 남서부 윈난성 출신 색목인으로 왕실에 끌려와 환관이 됐다. ‘마’씨는 무하마드의 음차다. 지략이 뛰어나 태감의 자리에 올랐고 7차례 대원정을 이끌었다.

 

15세기 정화의 인도·아프리카 원정
함선 62척에 선원만 2만7800명
당시 중국 GDP, 유럽 30국의 1.4배
자율·다양성 토대 과학혁명 역전

  

영락제

영락제

 영락제
(1360~1424).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세계 최대의 궁전인 자금성을 지었다. 환관, 이민족 등 신분에 관계없이 요직에 중용해 정통 관료들과 마찰을 빚었지만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대원정 같은 대담한 정책을 폈다.

조지프 니덤

조지프 니덤

조지프 니덤
(1900~1995).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니덤이 제자들과 함께 쓴 7권 25책의 역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15세기 이전까지 중국이 세계적 과학기술강국이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밝혀 서구우월주의를 깨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앵거스 매디슨

앵거스 매디슨

앵거스 매디슨
(1926~2010). 2000년간 세계 경제사를 연구한 영국의 경제사학자. OECD 초대 경제개발부국장을 지낸 뒤 네덜란드 흐로닝언대학 교수로 일했다. 『매디슨 프로젝트』는 기원후 전 세계 국가의 경제 흥망사를 다룬 방대한 연구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鄭和)였더라면. 지금처럼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이거나 할리우드가 세계 대중문화의 표본이 아닐 수 있죠. 정화의 대원정 후에도 명(明)이 해양 정책을 지속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1405년 정화는 영락제의 지시로 첫 항해에 나섰습니다. 1430년까지 7차례 원정을 떠나 인도의 캘리컷,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아프리카 동안까지 다녀왔죠. 국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화가 귀국할 때는 아프리카 왕들로부터 사자·표범·기린 같은 조공을 받기도 했고요.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명사(明史)』에 따르면 정화의 함선 중 가장 큰 것은 길이 44장(丈·132m), 폭 18장(54m)에 이르렀습니다. 총 62척의 배에 2만7800명의 선원을 데리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조금 과장이 있었다 해도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길이 18m, 승무원 40여명)보다 훨씬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만일 정화가 아프리카 서안을 돌아 포르투갈의 함선과 마주쳤다면, 혹시나 콜럼버스가 출항했던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 먼저 도착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명이 대항해시대의 주인공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명의 국력은 세계 최강이었고, 근세 이전까지 중국은 한 번도 초강대국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앵거스 매디슨의 『매디슨 프로젝트』에 따르면 서기 1000년 중국의 인구(5900만 명)는 유럽 30개국을 합친 것(2556만 명)보다 많았습니다. 매디슨은 특히 1990년 물가를 기준으로 이 시대의 GDP 규모를 달러로 환산했는데(기어리-카미스 달러) 중국(274억 달러)이 유럽 30개국(109억 달러)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1500년에도 여전히 중국(618억 달러)이 유럽 30개국(441억 달러)을 압도했죠.
 
그러나 16세기 이후 두 문명은 역전됩니다. 1700년 유럽 30개국의 GDP(809억 달러)가 200년간 84% 늘어난 반면, 중국(828억 달러)의 성장률은 34%에 그쳤습니다. 1900년엔 유럽 30개국의 GDP(6739억 달러)가 중국(2181억 달러)의 3배나 됐고요. 50년 후엔 1조3962억 달러와 2449억 달러로 격차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처럼 16세기 이전까지 초일류 강대국이던 중국은 근세에 이르러 왜 병든 용이 됐을까요.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니덤 퍼즐’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저발전 원인을 ‘과학혁명의 부재’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이 중국과 유럽의 운명을 갈랐다”고 말합니다.
 
니덤은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 등 4대 발명품을 만들어낸 중국의 과학기술이 15세기까진 유럽을 앞섰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구의 비약적인 과학혁명을 중국이 따라가지 못했죠. 핵심 원인은 개방정책을 포기하고 쇄국정책으로 돌아선 데 있습니다. 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가 죽으면서 해외 원정사업도 덩달아 폐기됐죠.
  
개방정책 폐기로 과학 발전 더뎌
 
당시 명은 인력·자원이 풍부해 교역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특히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더 많은 군사·외교 자원을 할애하면서 해양정책이 뒷전으로 밀렸죠. 15세기 난징에서 북쪽의 베이징으로 천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니덤은 “중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했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체제와 유교 전통으로 자율과 개방성이 부족했다”고 진단합니다.

1000년간 유럽·중국의 경제규모 변화

1000년간 유럽·중국의 경제규모 변화

반면 유럽은 봉건제가 무너지고 르네상스에서 꽃핀 학문과 예술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신항로 개척으로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며 새로운 기술과 물자를 받아들였죠. 구질서의 해체와 시장의 확대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였고요. 이런 토양 아래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이어지는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은 이를 현실에 적용한 기술의 발전을 견인하며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무기를 발달시켰습니다. 기술과 군사력은 서구의 나라들이 훗날 제국주의로 치닫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죠. 그 때문에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은 종교의 출현 이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근대과학의 탄생』)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중국과 유럽의 사례를 볼 때 과학혁명은 자율과 개방성, 다문화 같은 근대적 요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과학혁명을 위해선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과학과 인간의 가치』)의 말처럼 사상·비판의 자유, 이를 받아들이는 성찰적 지혜가 있어야 과학의 꽃을 피울 수 있죠.
 
같은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이 프랑스·독일을 치고 나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1500년 네 나라의 1인당 GDP는 비슷했지만, 1600년 네덜란드(1381달러)는 프랑스(841달러)·독일(791달러)을 멀찌감치 따돌렸습니다. 1700년엔 2130달러로 프랑스·독일(910달러)의 2배를 넘어섰고요.
 
16·17세기 네덜란드의 급부상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해상 교역에 신경 썼기 때문입니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경작이 어려웠던 네덜란드는 1579년 스페인에 독립선언을 하면서 여러 나라의 인재를 받아들입니다.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온 개신교도 중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과학·예술·학문의 꽃을 피웠습니다.
 
18·19세기 바통을 이어받은 나라가 영국입니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부터 일찌감치 민주주의의 싹을 틔워온 영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기술 혁신을 위해선 창의성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사회 전반에 다양성과 개방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요람인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과학자까지 이념의 덫 씌워 적폐몰이
 
이처럼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성이 있어야 과학이 발전할 수 있고, 과학적 사고가 널리 퍼져 있어야 문명이 진보합니다.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관용과 개방, 다양성의 정신을 존중하며 과학기술을 꽃피우고 선진국이 됐습니다. 눈부신 과학의 성과는 민주적 토양 아래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떤가요. 얼마 전 신성철 KAIST 총장이 정부의 무리한 고발로 20개월간 검찰 수사를 받다 무혐의 처분 됐습니다. 그는 지난 정권에서 임명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문입니다. 처음부터 과학계는 “문재인 정부가 무리하게 적폐로 내몬다”며 반발했습니다. 당시 네이처도 “한국 과학자들이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고 있다”고 지적했고요.
 
2018년 4월 임기 2년을 남기고 사퇴한 임기철 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과기부 차관으로부터 ‘촛불 정권이 들어섰으니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임기를 못 채우고 그만둔 기관장만 12명입니다. 단지 지난 정권의 인사란 이유로 적폐 딱지를 붙여 내쫓는 것은 과거 유럽의 종교박해와 무엇이 다른가요.
 
과학자를 홀대하고, 원전과 같은 과학 정책조차 비과학적 결정을 내리는 풍토에선 기술 발전도, 경제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치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필요합니다. 오직 이성과 논리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다양한 생각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개방적 풍토에서만 창의성과 혁신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은 얼마나 민주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하고 있을까요.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848579#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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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

포스트 코로나 주인공은 인도…10년 뒤엔 일본도 제친다

포스트 코로나 주인공은 인도…10년 뒤엔 일본도 제친다

[중앙일보] 입력 2020.08.16 14:19

인도 정부가 15일 1조4600억 달러(약 1734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충격을 방어하는 차원이다. 최근 인도에선 경제활동이 곳곳에서 중단된 영향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장 상황은 나쁘지만, 중장기 성장 전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망이다. 인도가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글로벌 생산기지로 부상하면서다. 

인도 경제성장. 셔터스톡

인도 경제성장. 셔터스톡

한국은행이 16일 ‘인도 경제 성장배경 및 코로나19 이후 전망’ 보고서를 내놨다. 일단 코로나19로 인해 인도 경제의 단기적인 성장세 둔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인도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최근 250만명을 넘어섰다. 미국·브라질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사망자도 영국을 제치고 세계 4위가 됐다. 확산 초기엔 강력한 봉쇄조치(3월 25일~5월 3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일평균 확진자 수가 5만명 이상으로 늘었다.
 
당장 봉쇄조치 기간에만 취업자 수가 1억명 이상 줄었다. 산업생산은 4월 전년 동기 대비 57.6%나 줄어든 뒤, 5월에도 큰 폭으로 감소(-34.7%)했다. 주욱 한은 아태경제팀 과장은 “소비 및 투자 위축의 장기화가 불가피해 회복 속도가 더딜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인도의 경제성장률을 -4.5%로, 세계은행은 -3.2%로 전망했다.

1991년 개방 경제체제로 전환한 인도는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콜센터 같은 정보기술 기반 아웃소싱 서비스업(IT-BPO)의 고성장, 제조업 생산능력 확충, 소매금융 활성화를 통한 내수시장 확대가 비결로 꼽힌다. 특히 2014년 세계 10위권에 도달한 이후 2019년까지 연평균 성장률(6.84%)은 중국(6.81%)보다 앞설 정도로 탄탄한 흐름을 보였다. 이런 성장세가 코로나19로 확 꺾인 셈이다.
 
감속은 불가피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전망은 여전히 밝다. 일단 인구를 바탕으로 한 성장 잠재력이 탁월하다. 인도의 인구는 2027년 중국 추월해 세계 1위에 올라설 전망이다. 주 과장은 “구조 측면에서도 2040년까지 생산연령인구 비중이 꾸준히 높아진다”며 “고령층 부양 부담 축소와 높은 내수기여도 등 인구보너스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인구 증가가 경제성장에 따른 고용 개선 및 중산층 확대와 상승 작용을 할 것이란 분석이다.

인도 뭄바이의 스카이라인. 셔터스톡

인도 뭄바이의 스카이라인. 셔터스톡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글로벌 공급망(GVC)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이 커진 것도 기회다. 최근 많은 글로벌 기업은 공급망의 안전성 확보를 위해 생산기지를 중국 이외의 국가로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기존 중국 생산물량 중 약 20%를 인도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 애플이 대표적이다.
 
2014년 모디 정부 출범 이후 인도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메이드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을 추진 중이다. 철도·전력 등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과감하게 규제를 푸는 내용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의 사업용이성(Doing Business) 순위는 2014년 142위에서 지난해 63위로 79단계이나 상승했다. 주 과장은 “외국인 직접투자(FDI) 유치를 위해 중국에서 옮겨오는 기업에 생산 연계 인센티브와 세제 혜택을 늘리고 있다”며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체결되면 생산기지 이전이 더욱 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바탕으로 인도가 2029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일본경제연구센터)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한국과 인도의 교역액은 지난해 207억 달러(11위)로 전체 무역 규모의 2.0%를 차지한다. 전 세계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3.4%를 차지하는 인도의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교역이 활발하다고 보긴 어렵다. 
 
인도 수입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3.3%, 한국의 해외직접투자에서 인도의 점유율은 0.7%에 그친다. 주 과장은 “인도의 글로벌 공급망 참여 확대에 따라 성장이 기대되는 중간재 및 자본재 시장 공략을 강화해야 한다”며 “또 가파른 소비 증가에 대응해 수출 품목 다변화로 인도 내수시장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849875?cloc=joongang-home-newslistleft#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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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

‘Frenemy’란 말 들어보셨나요? 당신에게 독이 되는 4가지 인간 유형

‘Frenemy’란 말 들어보셨나요?

당신에게 독이 되는 4가지 인간 유형

글 김혜인 기자  202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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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친구관계를 지키려면 가치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대인관계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스턴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한 헨리 머레이(Henry Murray) 박사는 독성 있는 사람들은 4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 독을 퍼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1. 악성 나르시시스트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적극적이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매력을 가진 듯 보인다. 소유욕이 강하고 폭언을 하는 면이 있어 남을 통제하는 것에 능숙하다. 이런 점들이 언뜻 강한 리더십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특출한 이기주의와 특권의식에 가깝다. 

때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이끌려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 주리라는 기대로 관계를 형성하지만 악성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신 외에는 타인을 사물 취급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2. Frenemy (이해관계로 인한 전략적 협력관계인 동시에 경쟁관계)

Frenemy · 프레너미친구(friend)와 적(enemy)의 합성어다. 이런 관계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동료들이다. 일정 부분 협력관계를 요하지만 개인마다 성과를 내야 하는 경쟁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맥락에 따라 친구가 되기도 적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에 처세가 필요한 관계이다. 이들은 인간적인 관심을 주고받는 친구와 달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가치관을 달성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이해관계인이다.

영미권에서는 ‘fair-weather friend’라는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 친구란 뜻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친구를 자처하지만 곤경에 빠졌을 때는 모르는 척하는 동료를 말한다. 이러한 유형은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 독을 쏘는 표현이나 생각을 주입하기 때문에 어설프게 착한 보통의 사람들은 선의로 받아들이기 쉬우며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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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사에 부정적인 사람들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행동이 불규칙하고 종종 고집스러운 자기주장과 비난을 교묘하게 숨겨서 표현한다. 이들이 주로 취하는 행동은 ‘수동적 공격성’이다. 겉으로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재적으로 공격자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난 너의 이런 새 옷이 좋아, 이런 건 10년 전만 해도 인기가 많았겠지?”라고 말한다. 상대방은 칭찬 뒤에 모욕이 있음을 알아차렸더라도, “나는 그것이 좋다는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이들은 대개 만사를 냉소적이고 비관적으로 비꼬는 경향을 가진다.

4.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유혹적인 사람들

사람의 관심이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마치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행동한다. 과장된 정서 표현, 격렬한 대인관계, 자기중심적인 태도,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행위로 극적인 신체적 행동을 보인다. 작은 사건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반응하며, 행동이나 언어 표현이 미성숙하고 허영심이 많으며 감정표현을 많이 한다.

주변에 지나치게 요구를 하고 끊임없이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만날수록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며, 갈등을 자주 유발하여 인간관계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불안을 보상받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취하며 강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효용을 얻지 못하면 쉽게 관계를 저버린다. 

[출처] http://mindgil.chosun.com/client/board/view.asp?fcd=&nNewsNumb=20200869643&nCate=C04&nCateM=M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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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권력자의 ‘선한 의도’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권력자의 ‘선한 의도’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

국가란 무엇인가

등장인물·이론
사울

사울

사울
재위 BC 1037~1010년. 선지자 사무엘이 세운 유대 왕국의 첫 번째 왕. 양치기 소년이던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 후 사람들의 존경을 얻자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사무엘과 틀어진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해 자살한다.

 

발생론 “국가는 필요악, 견제해야”
목적론 “목표 위해 개인 희생 가능”
성추행, 검찰 흔들기…권력 사유화
“의회정치 무력화, 전체주의 비슷”

  

다윗

다윗

 다윗
재위 BC 1010~970년. 유대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들은 솔로몬 왕이다. 블레셋의 전사 골리앗을 쓰러뜨려 영웅이 됐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다윗의 청년시절을 모델로 했다. 성서에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적 국가관
국가는 고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사진)는 국가가 개인의 행복과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국가를 지배계급의 착취 도구로 본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도 목적론적 국가관의 일종이다.  

로크

로크

발생론적 국가관
목적론적 국가관은 국가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권력의 주체는 시민이며, 국가는 그저 필요악일 뿐이다. 정치의 핵심은 국가의 권한을 견제하는 데 있다. 로크(사진) 등의 사회계약론이 대표적이다. 

“너희의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고 딸은 시종을 삼을 것이다. 양을 키우고 밭을 갈아 모두 바칠 것이며 끝내 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왕을 원하는가?”
 
구약성경(사무엘기)에 기록된 선지자 사무엘의 예언입니다. 하늘에 왕을 내려달라던 유대인들의 기도에 대한 답변이었죠. 이들은 백성을 하나로 모아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열망했습니다. 사무엘은 ‘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유대인들은 강력한 국가의 꿈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왕이 된 이가 사울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성격이 오만하고 시기심이 커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습니다. 뒤를 이어 지혜로운 청년이 왕좌에 오르니, 바로 다윗입니다. 소년 시절 골리앗을 물리친 그는 인자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의 치세는 아들인 솔로몬까지 이어져 유대 왕국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구에르치노가 그린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1646년).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울은 백성들이 존경하는 청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다.

구에르치노가 그린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1646년).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울은 백성들이 존경하는 청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 이야기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무엘의 경고처럼 국가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필요악’으로 보는 것이고요. 둘째는 다윗·솔로몬 같은 지혜로운 왕이 다스리며 국가가 ‘선한 의지’를 실현한다는 입장입니다. 두 국가관을 구분해 전자를 발생론, 후자를 목적론이라고 부릅니다.
 
목적론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정치학』에서 “국가의 목적은 인간의 선한 생활이며, 정치사회는 고결한 행동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시민 각자의 행복은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국가 권력은 개인의 권리에 우선합니다. 그의 이론은 계몽시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교회만큼이나 무소불위의 지위를 누려 철학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17세기 이후 많은 사상들이 그를 공격하며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서양철학사』)
 
선두에 섰던 이들이 사회계약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에 숭고한 목적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는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계약을 맺어 권한을 위임해 생겨났을 뿐”(홉스)이죠. 로크는 한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 헌법의 원리인 국민주권론을 강조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국민이 만들어 놓은 원칙, 즉 법에 의해서만 행사돼야 하며(법치주의) 만일 국가가 주권자의 의사에 반하면 사회계약을 해지할 수(저항권) 있습니다. (『통치론』)
 
로크의 이론은 몽테스키외로 이어져, 삼권분립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그는 입법·행정·사법 세 기관의 견제와 균형이 바탕 된 대의정치야말로 이상적 정치체제라고 봤죠. (『법의 정신』) 그의 사상은 미국 독립혁명의 근본이념이 됐고, 최초의 삼권분립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깬 사회계약론
 

선지자 사무엘의 유년을 묘사한 그림. 조슈아 레이놀즈 ‘어린 사무엘’(1776).

선지자 사무엘의 유년을 묘사한 그림. 조슈아 레이놀즈 ‘어린 사무엘’(1776).

이처럼 국가의 존재 이유는 목적론에서 시작해 발생론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역사 발전의 주체를 ‘국가’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은 것과 같습니다. 시민의 권리를 강조한 미국 헌법의 첫 문장이 ‘We the People(우리 시민들)’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근대 이후 개인은 권력의 객체가 아니라 분명한 주체로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유교 전통과 공동체 이데올로기가 공고한 한국사회에선 목적론적 국가관이 여전합니다. K방역의 성공이 대표적인 예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사생활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서구에선 한국식 모델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독일의 슈피겔지는 K방역은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한 유럽에선 도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논평하기도 했죠.
 
물론 목적론적 국가관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탁월한 정치인’이 전제돼야 하죠. 국가에 ‘선한 의도’라는 인격을 부여하는 순간 통치자에게 지나친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때 통치자의 철학과 역량에 따라 ‘선한 의도’가 다른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절제’ 같은 정치가의 공적 역량이 시민보다 월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통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쓴 것도, 어린 왕세자를 경연을 통해 성군으로 길러내려 한 것도 같은 이유였죠.
 
그러나 현 집권세력은 선한 의도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정치인에게 필요한 공적 역량은 부족합니다. 정의의 기준부터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기편이냐 아니냐’에 놓여 있죠.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수사할 때는 성인처럼 떠받들다가, 대통령의 지시대로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했더니 만고의 역적으로 몹니다. 상대 정파의 조그만 흠집까지 적폐로 몰 때는 언제고, 조국·윤미향 사태에서 드러난 각종 편법과 범죄 의혹에 대해선 눈감습니다.
 
공사를 구분하는 절제 역량도 부족합니다. 공화국(republic)은 라틴어 ‘공적인 것(res publica)’에서 유래했습니다. 공화국의 리더는 높은 공공의식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신은 다주택자이면서 남들에게 집을 팔라고 하거나(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 투기세력을 비판해놓곤 재건축에 투자하면서(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조국에게 ‘마음의 빚’을 표명한 일도 공사 구분을 못했기 때문이죠.
  
말로는 ‘선한 의도’ 행동은 ‘편 가르기’
 
특히 최근 여당 지자체장들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시민이 부여한 공적 권한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데 불법적으로 사용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여권은 이를 옹호하는 듯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미화 발언은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합니다. 내 편이면 무조건 감싸주는 특유의 ‘내로남불’ 정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죠.
 
문명의 발전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식 국가관이 사회계약론으로 발전한 것은 통치자의 역량에 온 사회를 맡기는 것의 기회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역사엔 늘 세종 같은 성군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설령 최고 권력자가 높은 수준의 정의와 절제 역량을 갖고 있다 해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인까지 같다고 볼 순 없습니다.
 

 

반면 ‘국가=필요악’이고 개인을 권력의 주체라고 가정하면, 정치인은 시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일 뿐입니다. 시민은 주기적으로 대표를 교체하고 일상에서 비판적으로 정치인을 견제합니다. 이렇게 하면 권력자의 복불복 문제도 해결되며,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의 횡포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로크(국민주권)와 몽테스키외(삼권분립)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것이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의회정치를 강화하고 시민의 역량을 높이는 일입니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 특히 야당을 건너뛰고 지지자들만 등에 업고 독주하는 ‘직거래 정치’를 견제해야 합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다원적 체제인 대의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의 ‘총의(總意)’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도 필요합니다. 정치인에 대한 팬덤으로 맹목적 애정만 보낼 게 아니라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하죠. 과거 그의 집권 후 ‘노감모(노무현을 감시하는 모임)’로 역할을 바꾼 비판적 시민들처럼 말입니다. 현재 좌우 양극단의 지지자들처럼 ‘깨어있기’보다 ‘조직된 힘’에만 비중을 싣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얼마 전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거대 권력 앞에서 공정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호를 바랐던 정부·여당으로부터 또 다른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80년대 국가의 폭력에 맞서 제일 앞장서 싸웠던 그들에게 ‘국가란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권력자의 ‘선한 의도’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826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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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

[오시영의 겜쓸신잡] 라그나로크 속에 담긴 ‘종말 신화’ 스토리

[오시영의 겜쓸신잡] 라그나로크 속에 담긴 ‘종말 신화’ 스토리

입력 2020.07.12 06:00

 

게임을 통해 학습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게임 안에는 문학·과학·사회·상식 등 다양한 분야 숨은 지식이 있다. 게임을 잘 뜯어보면 공부할 만한 것이 많다는 이야기다. 오시영의 겜쓸신잡(게임에서 알게된 쓸 데 없지만 알아두면 기한 느낌이 드는 동사니 지식)은 게임 속 알아두면 쓸데없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한 잡지식을 소개하고, 게임에 대한 이용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코너다. [편집자 주]

그라비티의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넥슨 ‘바람의나라’, 엔씨소프트 ‘리니지’와 함께 1세대 온라인게임 시절을 풍미했던 게임이다. 3D로 구성한 배경 위에 2D 도트 캐릭터를 표현하는 아기자기한 2.5D 그래픽으로 남성은 물론 여성 게이머에게도 사랑을 받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7일 나온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풀 3D 방식으로 한층 더 아기자기한 그래픽으로 업그레이드됐다. 11일 구글 플레이스토어 매출 10위에 오르며 장기 흥행의 발판을 마련했다.

라그나로크 오리진 게임 화면 / 오시영 기자
‘라그나로크’는 사실 북유럽(노르드) 신화에 나오는 종말 신화의 이름이다. 종말 신화는 천주교나 개신교 성서에 있는 요한묵시록(계시록)과 성격이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대 노르드어 라그나로크(ragnarǫk)에서 라그나(ragna)는 ‘지배하는 권력자나 신의 복수형’이며, 로크(-rǫk)·뢰크(-røkkr)는 형태 별로 전자는 ‘운명’, 후자는 ‘파멸, 황혼’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운명’, 라그나뢰크는 ‘신들의 황혼’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다.

라그나로크를 맞기 전 인간계(미드가르드)는 인륜(人倫)이 사라진 혼란기다. 해와 달이 사라지고 여름이 없는 혹독한 3번의 겨울인 핌불베트르(Fimbulvetr)를 맞는다.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 로키(최고 신 ‘오딘’의 의형제이자 참모)가 입을 벌리고, 땅과 하늘의 천장에 동시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늑대 펜릴, 너무 커서 자신의 몸으로 세계를 한 바퀴를 두르고도 꼬리를 물 수 있는 뱀 요르문간드 등이 속박에서 풀려난다. 펜릴과 요르문간드는 로키의 아들이다. 이들은 라그나로크가 시작되자 명계를 지키는 개 가름, 불의 나라 무스펠헤임의 거인 수르트 등과 세상을 휩쓸고 신과 전쟁을 벌인다.

최고 신 오딘은 펜릴에게 한 입에 삼켜져 패배하고, 펜릴은 오딘의 아들인 비다르에 의해 입이 찢기고 창이 심장에 박혀 죽는다. 요르문간드는 숙적이자 오딘의 아들 토르와 싸우다 ‘묠니르’(토르의 망치)에 머리를 맞아 죽는다. 하지만 토르는 요르문간드의 뱀독(蛇毒)에 중독돼 아홉 걸음을 뗀 후 쓰러진다. 로키는 숙적 헤임달과 겨루다 머리를 서로의 몸에 박는 기이한 자세로 동귀어진한다.

전쟁 후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불의 거인 수르트는 불의 검을 휘둘러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비롯한 세계를 불태워 멸망시킨 후 자신도 소멸한다. 세계 멸망 이후에는 세계수 등에 숨어 몸을 피한 남녀 한쌍과 목숨을 건진 일부 신, 부활한 신이 문명을 재건한다.

만화 라그나로크 1권 표지 / 구글 이미지
어째서 아기자기한 게임 제목에 종말 신화의 이름이 붙였을까. 사실 이 게임은 라그나로크 신화를 직접적인 모티프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이명진 만화가가 그린 소년 만화 ‘라그나로크’를 원작으로 한 게임이다. 당시에는 김진 작가의 ‘바람의나라’, 신일숙 작가의 ‘리니지’ 등 만화를 원작으로 게임을 만드는 일이 흔했다.

만화 라그나로크는 주인공 케이아스가 자신의 정체를 찾는 모험을 다룬 북유럽 신화 배경 만화다. 만화 내 등장인물 이름 등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것을 일부 차용했다. 이명진 작가는 라그나로크 온라인 개발에 직접 참여했고, 이후 만화가와 게임 개발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게임 개발에 집중한 탓에 라그나로크 원작 만화는 단행본 10권까지만 나오고 연재가 중단됐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에는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한 게임답게 궁그닐(오딘의 창 궁니르의 잘못, 묠니르와 마찬가지로 던져서 적을 찌르면 다시 손으로 돌아온다), 미스틸테인(오딘의 아들 발두르를 죽이는 데 사용된 겨우살이 나뭇가지) 등 신화 속 무기가 나온다. 모바일게임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튜토리얼 부분에서 비프로스트를 건너 발할라(북유럽신화의 천당)로 가는 장면을 담기도 했다.

라그나로크 오리진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발할라의 모습 / 오시영 기자
 
라그나로크 온라인에 등장하는 궁그닐과 미스틸테인 무기 / 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오시영 기자 highssam@chosunbiz.com

출처 : http://it.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1/20200711018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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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

임종을 앞두고 후회하는 5가지 호스피스 간호사가 목격한 공통적 반응들

임종을 앞두고 후회하는 5가지

호스피스 간호사가 목격한 공통적 반응들

글 김혜인 기자  20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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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전문 언론 <캔서 앤서 CancerAnswer> 대표 홍헌표씨(54)는 12년전 대장암 3기 발병을 받고 항암 치료 대신 자신의 마음습관, 몸습관을 180도 바꾸는 ‘힘든 작업’을 통해 암을 극복했다. 

그는 암환자들을 만나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라고 강조한다. 늘 자기 직분을 다하느라 자신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친구와 지인들에게 전하는 말인 동시에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는 말이다. 

그는 호주의 밀기 암환자 완화의료 전문 간호사 브로니 웨어가 임종을 앞둔 말기 암환자들에게서  12주 동안 들은 이야기중 공통적인 것만 뽑아 쓴 책 ‘죽기 전에 하는 후회 5가지’를 자주 인용, 소개한다.  

“인생과 저녁식사의 차이는 저녁식사엔 달콤한 것이 마지막에 나오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회한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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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좀더 솔직한 삶을 사는 용기가 필요했다. 

삶이 끝나갈 무렵에야 뒤돌아보며 정작 자신의 꿈은 절반도 이행하지 못했음을 한탄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실현하지 못한 것이다.

②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사이에 자식들의 어린 시절, 배우자와의 우애를 잃고 말았다는 후회다. 직장생활이라는 쳇바퀴에 그리 많은 삶을 소비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③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느라 속앓이를 해야 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④ 친구들과 좀 더 자주 만났어야 했다. 

자신들의 삶에 갇혀 황금 같은 우정을 잃어버렸다며 후회했다.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뒤늦게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그때는 이미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⑤ 내 자신이 좀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행복도 선택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몰랐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만족하고 있는 척했다고 한다. 낡은 양식과 습관에 갇혀, 이른바 익숙함이라는 ‘편안함’에 빠져 개인적 행복을 포기했다며 아쉬워했다.

인생은 겪어봐야 이해할 수 있는 교훈들의 연속이다. 시간은 위대한 스승이지만, 불행히도 결국엔 자신의 모든 제자를 죽이고 만다. 

[출처] http://mindgil.chosun.com/client/board/view.asp?fcd=&nNewsNumb=20200769466&nCate=C04&nCateM=M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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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

26살에 만든 인테리어 앱···누적거래 7000억 만든 ‘신의 한 수’

26살에 만든 인테리어 앱···누적거래 7000억 만든 ‘신의 한 수’

[중앙일보] 입력 2020.06.27 11:54   수정 2020.06.27 20:00

 인테리어 분야 최초 1000만 다운로드 기록. 한 달 방문자 수 740만명(앱·웹사이트 종합). 인테리어 플랫폼 서비스 ‘오늘의집’ 이야기다. 

 

[게임체인저: 그들의 성공 키워드3]
① ‘오늘의집’ 이승재 대표

[게임체인저: 그들의 성공 키워드3] '오늘의집' 이승재 대표

[게임체인저: 그들의 성공 키워드3] ‘오늘의집’ 이승재 대표

오늘의집은 온라인상에서 사용자가 자신의 집 사진을 올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가성비 좋은 인테리어 소품 구매와 함께 전문가 시공 의뢰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다. 2014년 인테리어 콘텐트 공유 서비스로 시작해 2016년부터는 가구 등 인테리어 용품을 함께 판매하는 ‘콘텐트 커머스’ 서비스로 진화했다. 지난 5년간 누적 거래액만 7000억원이 넘는다.

젊은 세대, 특히 1~2인 가구의 인테리어 고민을 풀어주는 서비스 '오늘의집'. 구글 플레이가 선정한 2018년을 빛낸 '올해의 베스트 앱'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집'을 만든 (주) 버킷플레이스 이승재 대표. 우상조 기자

젊은 세대, 특히 1~2인 가구의 인테리어 고민을 풀어주는 서비스 ‘오늘의집’. 구글 플레이가 선정한 2018년을 빛낸 ‘올해의 베스트 앱’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집’을 만든 (주) 버킷플레이스 이승재 대표. 우상조 기자

이 놀라운 기록의 서비스를 만든 사람은 이승재 (주)버킷플레이스 대표다. 서울대 화학생물공학과 재학 시절, 카페 같은 멋진 공간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돈은 없고 혼자 해결하기엔 인테리어가 너무 힘들었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챙겼다고 했다. 그렇게 디자인을 공부한 적도 인테리어 분야에서 일한 적도 없는 26살의 공대생이 만든 인테리어 서비스가 ‘대박’이 났다.  
 
이 대표가 말하는 핵심 성공 비결 3가지를 영상에 담았다. 한 가지만 먼저 공개하면 취업보다는 창업자의 길을 걷고 싶었던 그는 “누구나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것”에서 창업 아이템을 찾았다고 했다. 큰돈 들이지 않아도 사무실과 집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데 그 방법을 몰라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고 ‘누구나 쉽게 인테리어를 할 수 있는 서비스’의 가능성을 봤던 것. 인테리어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었던 ‘덕’도 톡톡히 봤다고 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공대생으로서 모든 인테리어 관련 정보 수집과 상품 거래를 ‘온라인’으로 집중시켰던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오늘의집을 출시하고 처음 2~3년간은 콘텐트에만 집중하다 보니 수익 모델이 없어 수입 제로. 이커머스를 시작했을 때는 1주일간 제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금의 7000억원 누적거래액 이커머스의 물꼬를 열어준 제품은 ‘액자’였다고 한다. 젊은 사용자들이 액자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된 이유는 뭘까. 이승재 대표의 3가지 성공 비결과 함께 영상에서 확인하시길. 
  
기획·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영상=김지선·정수경 그래픽=이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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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

中卒 아빠, 게임중독 中卒 형제를 직접 가르쳐 서울대로

中卒 아빠, 게임중독 中卒 형제를 직접 가르쳐 서울대로

조선일보 변희원 기자   

입력 2020.06.27 03:00

[아무튼, 주말]
[변희원 기자의 한 點]
중졸 3父子 노태권·동주·희주

노태권(가운데)씨는 게임 중독에 걸린 아들 동주(왼쪽)와 희주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같이 걷자”고 했다. 그는 “부모는 아이가 공부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되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하찮은 일에 빠지는 아이를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시행착오도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원이 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아이의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고 했다.
노태권(가운데)씨는 게임 중독에 걸린 아들 동주(왼쪽)와 희주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같이 걷자”고 했다. 그는 “부모는 아이가 공부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되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하찮은 일에 빠지는 아이를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시행착오도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원이 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아이의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큰아들 동주가 중학교 3학년 어버이날 때 쓴 카드. /노태권씨 제공
큰아들 동주가 중학교 3학년 어버이날 때 쓴 카드. /노태권씨 제공
‘어버이날

우리 아빠는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막노동꾼이다.

2006. 5. 8.’

노태권(64)씨는 중학교 3학년짜리 첫째 아들이 쓴 어버이날 카드를 발견하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멍하게 있을 정도로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저걸 보고 아들에게 화낼 생각도 못 했던 건 틀린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중학교 겨우 나온 막노동꾼인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멸치 똥 같은 아버지였죠. 멸치는 끓이면 감칠맛 성분이 우러나 요리의 맛을 높여주는 음식 재료이지만, 쓴맛만 내는 멸치 똥은 솥에 넣기 전에 떼버리잖아요.”

노씨의 최종 학력은 중졸(中卒)이고, 그는 40대 중반에야 한글을 뗐다. 두 아들도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첫째 동주(29)씨는 게임 중독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형처럼 게임에 빠졌던 둘째 희주(27)씨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다. 중졸 삼부자가 된 셈이다. 두 아들의 중졸이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 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노씨는 두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게임 중독이란 수렁에서 건져냈다. 동주씨는 2011년 서울대 경영대에, 희주씨는 2015년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두 사람 모두 4년 장학금을 받았다. 한글도 몰랐던 중졸의 아버지는 어떻게 두 아들을 서울대에 가도록 가르쳤을까? 최근 에세이집 ‘떼루 떼루 빠떼루 달인’을 펴낸 노씨와 두 아들을 함께 만났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의미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단다.

마흔 넘어서 아내에게 한글을 배우다

노씨 또래 중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 노씨는 예외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 시청 공무원이어서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두 남동생은 모두 연세대를 나왔을 정도로 집안에선 자식의 공부 뒷바라지를 잘해줬다. 난독증이 있는 노씨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글을 몰랐고, 교과 과목 공부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시험 성적으로 중학교 배치를 받던 시절에 그를 받아줄 학교는 없었다. 아버지는 친구가 교사로 있는 중학교에 그를 보냈다. 노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난독증이란 걸 알고 있었나요?

“옛날에 그런 게 뭐 있었나요, 요즘 사람도 난독증을 잘 모르는데. 글을 모르니까 어렸을 때부터 어디서든 바보 취급을 받았고, 아버지한테도 많이 맞았어요. 국민학교 때 집에 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걸 보고 무서워서 저수지로 뛰어든 적도 있었어요. 그날 아버지가 물에 뛰어들어 저를 꺼내주시면서 ‘괜찮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 후로 저를 때리거나 혼내지 않으셨어요. 중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에게 꽃을 받은 졸업생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가 저를 마중 나오곤 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학교도 못 가고 막노동을 하는 장남이 불쌍하고도 애틋했겠죠. 저는 아버지가 무서우면서도 죄송스러웠죠. 장남이 이러니까….”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은가요.

“글을 못 읽으면 어디 가나 갑질을 당해요. 똑같은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욕만 먹고 말 것을 전 주먹으로 맞았어요. 무시해도 되는 바보라고 생각하니까.”

―난독증을 고친 계기가 있습니까.

“아내 덕분입니다. 서른다섯 살에 은행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와 결혼했어요. 은행 지점장이던 아버지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는 당시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 한 대를 가진, 능력 있는 여자였죠. 결혼 후 막노동을 그만하고 아내가 모은 돈으로 공사장에 자재 납품하는 사업을 했는데, 꽤 잘됐습니다. 그러다 IMF가 오는 바람에 사업이 망했죠.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아파트와 패물을 다 팔았는데도 빚이 남았어요. 집에 찾아온 빚쟁이에게 아내가 1년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다니던 은행을 당장 그만두면 퇴직금이 얼마 안 나오지만, 1년 뒤 명예퇴직 신청을 하면 빚을 갚을 만한 퇴직금이 나온다고요. 덕분에 저는 신용 불량자 신세를 면했습니다. 다시 막노동을 하려는 저에게 아내가 글공부를 하자고 했습니다.”

노씨의 아내 최원숙(64)씨에게 “왜 글도 못 읽는 막노동꾼과 결혼했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첫눈에 나한테 반했다고 했어요. ‘나는 중졸에 막노동꾼입니다. 이런 나라도 좋다면 결혼하고 싶습니다’. 건장해서 남자답게 느껴지더라고요. 무엇보다 눈빛에서 억눌린 열정과 욕망이 보였어요. 내가 도와주면 그걸 발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현대판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다.

―고졸인 아내가 어떻게 난독증을 고쳤죠?

“저는 ‘홍’이란 글자를 보면 위아래에 ‘ㅎ’이 두 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아랍 문자를 보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으로 보이죠?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글자를 그냥 외웠어요.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만들 수 있는 글자가 총 1만1172자라던데, 그중에 ‘ ‘처럼 일상에서 실제로 쓰이지 않는 비(非)단어를 제외하면 약 1500자예요. 아내가 도서관 다니면서 1500자를 추려내서 종이 한 장에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적어주면 그걸 외웠어요. 외워도 계속 까먹는 통에 한글을 떼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노태권씨는 난독증을 극복했지만 여전히 보통 책의 활자를 보기 어렵다. 글씨가 두 배는 크고 진해야 한다. 아내가 수능 교재를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주면 남편은 그것을 갖고 다니면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했다
노태권씨는 난독증을 극복했지만 여전히 보통 책의 활자를 보기 어렵다. 글씨가 두 배는 크고 진해야 한다. 아내가 수능 교재를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주면 남편은 그것을 갖고 다니면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했다. /노태권씨 제공
―생계는 어떻게 했나요.

“아내는 은행을 그만둔 다음 식당에서 일했고, 저는 막노동을 했습니다. 아내는 일 마치고 새벽 한 시에 집에 와서도 저를 앉혀놓고 공부를 시켰어요. 저는 길을 걸어 다니거나 일터의 점심때, 쉬는 시간에도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난 뒤에 아내가 이젠 다른 공부도 하자고 하더군요. ‘내 나이 마흔다섯이면 십, 이십 년 살다가 죽을 건데 공부해서 뭐하냐’고 하니까 아내가 ‘100세 시대가 온다, 아직 반도 안 살았다’고 했어요.”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초등학교 3~4학년 사회·과학 교과서로 시작했어요. 한글을 알아도 작은 글씨는 눈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아내가 교과서 내용을 요약해서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줍니다. 그 종이를 테이프로 이어 붙여서 갖고 다녔어요. 출퇴근 시간이나 일터에서 볼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든 거죠. 아내가 책을 읽어서 테이프에 녹음해준 것도 있어요. 가끔 아내가 졸다가 코 고는 소리도 들려요(웃음). 당시 막노동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갔고, 대부분 여관에서 자거나 노숙도 했죠. 그런 날엔 길에서 그냥 공부하는 겁니다.”

―공사장에서 공부할 분위기가 아녔을 텐데요.

“다들 저를 정신 나간 놈 취급했죠. 그 나이에 막노동하면서 공부를 해서 어디에 쓰겠느냐고 놀렸고, 점심때 공부하고 있으면 와서 책을 발로 차기도 했어요. 쉬는 시간에 공부하다가 잘린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영어 단어장을 보면서 짜장면 배달하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갔어요. 한 손에는 단어장, 다른 한 손에는 철가방을 꼭 쥐고 있었더래요. 공부는 해야 하는데, 돈도 벌어야겠고….”

―공부는 어디까지 했습니까.

“공부를 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고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수능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EBS 수능 교재도 다 옮겨 적어서 저만의 교재를 만들어줬어요. 아내가 쓴 글자 수를 대충 따져보니 3000만 자가 넘어요. 혼자서 공부하다가 저만의 공부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7년 정도 됐을 때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풀어봤는데, 매번 만점이 나왔습니다. 2013년 공중파 TV 프로그램에 ‘공부 달인’으로 소개됐을 때 제작진 앞에서 그해 수능을 풀었는데 한 개 틀렸습니다.”

―자신의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어떻게 아들의 공부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나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정말 잘했어요. 첫째가 중학교 가서도 전교 상위권을 유지한다고 하기에 저희 부부는 그런 줄로만 알았죠. 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에 갔고, 아내는 식당에서 낮 한 시부터 밤 한 시까지 일했으니 학교에도 못 가봤죠. 첫애가 중3이 됐을 때 아내가 전화 와서 ‘동주가 전교 꼴찌에 가까운 성적표를 전교 3등으로 고쳤다가 걸려서 집을 나갔다’고 했어요. 성적 위조를 한 게 처음이 아니었대요. 그때 뭔가 잘못됐단 걸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죠. 애들이 공부를 포기한 지는 오래였고, 몇 날 며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노릇 못하면 친구라도 되자”

동주·희주 형제는 사이가 좋았다. 부모는 집을 비우고,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니 둘이 함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춘천에 살던 형제는 함께 가출을 자주 했다. 막노동하는 아버지와 식당일 하는 어머니가 있는 집이 싫었고, 어디 가서 게임이나 실컷 하고 싶었단다. 2007년 12월 자전거를 팔아 돈을 마련해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부산에 가는 데 돈을 다 써버린 형제는 가방에 들어 있는 20만원을 발견했다. 가출하는 아들 둘이 고생할까 봐 노씨가 미리 넣어둔 돈이었다. 동주씨는 “당시 다리를 다친 아버지가 공사장에 이틀 나가서 벌어온 돈이었다”며 “그날 바로 집에 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후 다시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아들이 가출할 줄을 어떻게 알았나요?

“이미 (가출을) 몇 번 했기 때문에 나갈 때가 되면 분위기가 느껴져요. 그럴 때면 못 나가게 하려고 운동화랑 옷을 빨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공사장에서 돈을 벌어서 가방에 넣어뒀죠. 혹시 길에서 자거나 밥을 못 먹을까 봐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별 볼일 없는 막노동꾼’이라고 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때 ‘아무리 돈·직업·학벌이 중요한 세상이라지만, 명문대 나오고, 부자이며, 잘나가야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 건가’라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돈과 능력이 중요한 게 현실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친구라도 돼주기로 했어요. 제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애들이 차마 그러진 못하고 저를 가끔 ‘벽공’(碧空·푸른 하늘)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게임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학교 다녀오면 집에 부모는 없지, 친구들은 다 학원 가지. 돈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아이들이 결국 할 게 게임밖에 없더라고요. ‘이건 애들 잘못이 아니다, 다 아버지 노릇 못 한 내 잘못이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하고 돌아와서 졸릴 땐 아내의 교재를 벽에 붙여놓고 서서 공부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기도 한다. /노태권씨 제공
일하고 돌아와서 졸릴 땐 아내의 교재를 벽에 붙여놓고 서서 공부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기도 한다. /노태권씨 제공
아이들과 걸었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

―게임 중독을 어떻게 고쳤나요.

“첫째가 중학교 졸업 전 한 학기를 남겨두고 학교에 안 가려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공부도 안 하니까 의미가 없는 거죠. 초등학교 졸업이 아이의 최종 학력이 될까 봐 불안했습니다. 제가 ‘주말에 나와 산책을 하면 게임 그만하라는 얘기 안 하겠다’고 빌다시피 얘기해서 애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여덟 시간 동안 소양강을 따라 25㎞를 걸으면서 제 나름대로 춘천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해줬는데,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한테 눈길 한번 안 주더군요. 그래도 몇 달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 도중 큰애가 ‘아빠, 밥 안 먹어?’라고 한마디 던지는데 눈물이 났어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걷는 게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게임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공부를 하기 위한 체력까지 미리 기를 수 있었다. 동주·희주씨는 “걷는 시간 빼고는 다 게임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덟 시간씩 걷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게임을 오래 못 했다. 그렇게 게임하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노씨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하던 동주씨를 자신의 일터에 데리고 다녔다. 부자(父子)는 전국을 돌면서 공사장·주유소·세차장 등에서 일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희주씨도 합류했다. 노씨는 “다행히 동주의 체력이 좋아서 몸 쓰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대신 나는 어린 아들을 학교에도 안 보내고 돈벌이시킨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일년 반 동안 전국 8000㎞를 돌아다니고 나서, 동주씨는 아버지에게 “공부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를 해보니까 중학교만 나와 갖고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게 아예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다. 공부를 해봤자 당장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상황을 바꾸려면 일단 공부를 해야 했다”고 했다. 2008년 8월, 또래 친구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아들과 전국 공사장과 주유소를 돌아

―아이를 데리고 다닌 이유가 무엇인가요.

“게임 중독에 빠진 아들을 보면서 좋은 아버지가 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동시에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아들한테 ‘아빠는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같이 다니자고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마치고 일을 시작한 아버지의 과거를 아들이 되풀이했네요.

“아이를 데리고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었어요. 한국 사회는 아이들에게도 실패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만 나온 애는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 안 간 애, 문제가 있는 애라고 낙인찍고 함부로 대합니다. 제 아이들은 게임을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아파서 학교를 포기했을 뿐이에요. 학교를 포기했다고 인생까지 포기하게 놔둘 순 없잖아요.”

―아이들은 게임을 끊었나요.

“아니요. 저는 아이들이 게임을 아예 못 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첫째는 저랑 일을 하러 다니면서도 PC방에 가서 한두 시간씩 게임을 했어요. 일이 힘들어지니까 그것도 잘 안 하더라고요. 나중에 공부할 때도 게임을 조금씩은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공부와 담을 쌓은 아들을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겠네요.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어요. 걸핏하면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좀 조용하다 싶으면 졸고 있고. 일단 5분 동안만 집중하는 공부법으로 시작했어요. 컴퓨터 자판을 잘 치는 애니까 5분 동안 영어 단어를 자판으로 치게 했고, 10분 휴식 시간과 게임 시간도 줬어요. 이걸 반복해서 적응시킨 다음에 공부 시간을 5분에서 10분, 20분으로 늘리다 보니 나중에는 100분도 거뜬히 집중하던데요.”

―명강사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고 합니다. 모의고사를 만점 맞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이 꽤 답답한 학생이었을 텐데요.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은 모습부터가 어찌나 귀엽던지. 공무원이었던 저희 아버지에 비하면 저는 덜떨어진 아버지인 데다가, 공부도 0점부터 시작해서 100점까지 해봤습니다. 공부 못하는 심정은 제가 제일 잘 알죠. 저는 마흔 넘어서 공부 시작했는데, 아들은 열일곱 살에 시작했으니 시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목표는 애를 서울대 보내는 게 아니라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좀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하루는 자습을 시키고 일을 다녀왔더니 아이가 책을 다 찢어놓고 밖에 나갔어요. 아내한테 들어보니, 아버지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불안하고 답답해서 소양강에 다녀왔대요. 그런 모습을 보고 저는 더 천천히 가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왼쪽부터 첫째 아들 동주, 어머니 최원숙, 아버지 노태권, 둘째 아들 희주.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왼쪽부터 첫째 아들 동주, 어머니 최원숙, 아버지 노태권, 둘째 아들 희주.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사교육은 전혀 없었나요.

“아내는 차비를 아끼려고 밤늦게 일 끝나고 집까지 걸어왔는데, 사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일하는 시간을 좀 줄이고 7년 동안 공부한 비결과 시험 보는 요령을 모두 전수했어요. 수능 전 과목을 직접 가르쳤어요. 동주는 두 달 만에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이듬해 수능을 본 뒤 연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지 1년 7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에요. 실력보다 점수가 덜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재수를 하겠다고 해서 아예 학교 등록을 안 했어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1년 뒤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어요.”

―둘째 희주는 또래에 비해 대학을 더 늦게 들어갔습니다.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학교를 못 나가는 날이 더 많았고, 결국 고1 때 자퇴를 했어요. 형이 대학 가는 걸 보고 자기도 공부를 하겠다는데 몸이 계속 아팠어요. 나중에 대상포진까지 걸려 눈도 못 뜰 지경이 돼서 책을 못 보길래 제가 EBS 교재를 옆에서 읽어주면서 강의를 했어요. 수능 열두 과목을 그렇게 가르치다가 저도 몇 번 쓰러졌어요.”

희주씨는 2013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아토피 때문에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그는 학교를 관두고 서울대 간호학과를 목표로 다시 수능을 봐서 2015년 합격했다. 현재 동주씨는 로스쿨 준비를 하고 있고, 희주씨는 4학년에 재학 중이다. 형제는 아버지가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고 ▲간섭을 거의 안 했으며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게임 중독을 끊어내고 대학 입시를 성공시켰다고 봤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자식이 움직이질 않는 것 같아요. 부모도 매력을 드러내야 아이들이 따르고 싶어 하고, 부모가 움직여야 아이들이 뒤따라가지 않을까요. 저희는 아버지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하고 아버지가 향하는 곳으로 방향을 튼 경우죠.”(동주)

부모가 매력이 있어야 아이가 따른다

―요즘 ‘아빠 찬스’란 말이 있습니다. 주로 ‘잘나가는 아빠’의 덕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제가 아버지 노릇을 못 해서 애들이 힘들어졌고, 나중에 조금이나마 제 노릇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제가 게임 중독 걸린 애 둘을 직접 가르쳐서 서울대에 보냈단 얘기가 나오니까 서울에서 큰돈 갖고 와서 자기 애도 가르쳐달란 부모가 꽤 있었어요. 아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애 공부시키는 부모도 세상에 많다. 우리가 그걸 잘 알면서 어떻게 이 돈 받고 애들을 가르치느냐’고 다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아내가 참 고마웠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애들한텐 ‘아빠 찬스’가 없었지만, 저에게 ‘아내 찬스’가 있었네요.”

―학력은 여전히 중졸입니다.

“원래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었고, 공부가 재밌어서 계속 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만점을 받으니까 나중에는 해외 유학도 가볼까 하는 큰 꿈까지 꿨어요. 그때쯤 애들의 문제를 알고 거기에만 매달리느라 제 공부를 못 했죠. 애당초 제 목표가 제가 대학에 가는 것이거나 애들 서울대 보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쯤 많이 허탈할 거예요. 100세 시대를 살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니까, 그걸 이제 써먹어야죠.”

노씨의 다음 목표는 창업이다. 개발자·기획자 세 명과 함께 7월에 법인을 설립하고 50대 이상을 위한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플랫폼 ‘펼치고’를 선보일 계획이다. 노씨의 사업 계획이 적혀 있는 서류의 글씨가 책상 맞은편에서 보일 정도로 컸다. 남들은 한글 폰트 10~12포인트 크기로 볼 수 있는 글자를 그는 18~20포인트로 키우고 ‘굵게’까지 만들어야 볼 수 있다. 정자(正字)로 쓰지 않은 글씨도 여전히 못 읽는다. 그는 “난독증은 완전히 고쳐지는 게 아니다. 나는 아직 좀 모자란 사람이다”라고 했다.

“집도 절도 없는, 돈이 없어서 학원도 보내주지 못했던 막노동꾼 아버지이지만,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모든 것을 잘하는 완벽한 아버지는 없을 것이고, 아버지라고 해서 전부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처럼 모자란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6/20200626028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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