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언론 51년전 베트콩 '구정 대공세'···전투 졌지만 전쟁 이겼다
2019.02.24 14:19
51년전 베트콩 '구정 대공세'···전투 졌지만 전쟁 이겼다
[중앙일보] 입력 2019.02.24 06:00 수정 2019.02.24 10:59
51년 전 구정 대공세, 베트남 공산당 승전 전기
군사적 패배해도, 반전 분위기로 정치적 승리
북베트남군·베트콩, 68년 설날 새벽 기습 공격
4만5000명 숨지고 게릴라 궤멸돼 군사적 실패
미국서 반전 분위기 확산하며 전세 역전
미국, 협상 나서 73년 파리협화협정 맺어
닉슨 종전선언과 미군 철수 2년 뒤 공산화
군사력·경제력 앞서도 심리전 밀려 패전
김정은, 호치민 주석 묘소 참배 확실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100여 도시를 설날 새벽에 기습 공격한 구정 대공세가 시작된 초기인 1968년 2월 1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의 거리에서 촬영된 이 사진은 베트남전의 비극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평가 받아왔다. 베트남 육군 소장으로 당시 국가경찰국장이던 응우옌응옥루안(阮玉鸞, 930~1998년)이 포로로 잡혀온 민간인 복장의 베트콩 대위 응우옌반렙(阮文歛, 1931~1968년)을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고 있다. 이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가 촬영해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사이공의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보도사진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사회에 베트남전 반전 분위기를 불러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애덤스 기자는 1998년 7월27일 발행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기고문에서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지만 나는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면서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는 1998년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화를 보내고 "미안합니다. 내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라고 사과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장군은 베트남전 패전 뒤 미국으로 도피해 피자집을 하다가 이 사진의 주인공으로 알려지면서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애덤스 기자에 따르면 장군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AP=연합뉴스]](/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1492ba00d220115ce96b754be2883191.jpg)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100여 도시를 설날 새벽에 기습 공격한 구정 대공세가 시작된 초기인 1968년 2월 1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의 거리에서 촬영된 이 사진은 베트남전의 비극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평가 받아왔다. 베트남 육군 소장으로 당시 국가경찰국장이던 응우옌응옥루안(阮玉鸞, 930~1998년)이 포로로 잡혀온 민간인 복장의 베트콩 대위 응우옌반렙(阮文歛, 1931~1968년)을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고 있다. 이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가 촬영해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사이공의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보도사진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사회에 베트남전 반전 분위기를 불러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애덤스 기자는 1998년 7월27일 발행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기고문에서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지만 나는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면서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는 1998년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화를 보내고 "미안합니다. 내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라고 사과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장군은 베트남전 패전 뒤 미국으로 도피해 피자집을 하다가 이 사진의 주인공으로 알려지면서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애덤스 기자에 따르면 장군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AP=연합뉴스]
![1969년 1월31일 설날 새벽을 기해 북베트남군과 베트공이 남베트남 전역을 기습 공격한 구정 대공세 직후의 모습. 사이공 거리에는 사살된 베트콩, 부상당한 동료를 치료하는 남베트남 군인들, 포로로 잡힌 베트콩 등이 보인다. AP통신의 에디 애덤스 기자의 또 다른 사진이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설날 새벽을 틈타 남베트남을 기습 공격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고 전투에선 패배했다. 하지만 전쟁의 비참함을 보여주면서 미국과 서방에 반전 분위기를 유발해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거뒀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북베트남 및 베트콩과 협상을 시작했으며 이는 1973년 파리 협화협정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종전선언 및 미군 철수로 이어졌다. 그 2년 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점령해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달성했다. [AP=연합뉴스]](/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6dbd09f57d5e49287e5e6cc43cde73c4.jpg)
1969년 1월31일 설날 새벽을 기해 북베트남군과 베트공이 남베트남 전역을 기습 공격한 구정 대공세 직후의 모습. 사이공 거리에는 사살된 베트콩, 부상당한 동료를 치료하는 남베트남 군인들, 포로로 잡힌 베트콩 등이 보인다. AP통신의 에디 애덤스 기자의 또 다른 사진이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설날 새벽을 틈타 남베트남을 기습 공격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고 전투에선 패배했다. 하지만 전쟁의 비참함을 보여주면서 미국과 서방에 반전 분위기를 유발해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거뒀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북베트남 및 베트콩과 협상을 시작했으며 이는 1973년 파리 협화협정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종전선언 및 미군 철수로 이어졌다. 그 2년 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점령해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달성했다. [AP=연합뉴스]
![베트남전 당시 베트공이 건설해 활용한 지하 터널의 입구. 밖에서 보면 판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잘 위장됐다. 1968년 구정 대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이런 지하 터널 등을 이용해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100개 이상의 도시를 새벽에 기습 공격했다. [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4a6ed0f08af3443339b11e7482a6eaab.jpg)
베트남전 당시 베트공이 건설해 활용한 지하 터널의 입구. 밖에서 보면 판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잘 위장됐다. 1968년 구정 대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이런 지하 터널 등을 이용해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100개 이상의 도시를 새벽에 기습 공격했다. [중앙포토]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 산속 깊은 곳에 조성한 승리공원의 대형 석상. 1954년 승전기념식을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 산속 깊은 곳에 조성한 승리공원의 대형 석상. 1954년 승전기념식을 재현해 전투 주역 25명을 새겼다.가운데가 보응우옌잡 장군의 석상. [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7558ebf2b30b7292cab11bc27969f0b2.jpg)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 산속 깊은 곳에 조성한 승리공원의 대형 석상. 1954년 승전기념식을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 산속 깊은 곳에 조성한 승리공원의 대형 석상. 1954년 승전기념식을 재현해 전투 주역 25명을 새겼다.가운데가 보응우옌잡 장군의 석상. [중앙포토]
![북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1890~1969년) 초대 주석(오른쪽)과 보응우옌잡(武元甲·1911~2013년) 장군의 1945년 모습. [위키피디아]](/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fd789211c3200e03af19d37a24268953.jpg)
북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1890~1969년) 초대 주석(오른쪽)과 보응우옌잡(武元甲·1911~2013년) 장군의 1945년 모습. [위키피디아]
제네바 협정 뒤 프랑스군을 대신해 미군이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다. 베트남국은 명목상의 베트남 황제로 프랑스의 허수아비였던 바오다이(保大·1913~1997년) 황제가 형식적으로 지배했다. 베트남국의 응오딘지엠(吳廷琰·1901~1963년, 고딘디엠으로도 불림) 총리는 인기 없던 바오다이 황제를 1955년 국민투표로 폐위시키고 베트남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1963년 군사 쿠데타 직후 군부에 의해 총살당했다) 남북 베트남은 계속 충돌했고 미군과 한국군을 포함한 외국군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등 군사적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갈수록 가열됐다.
![김창선 북한 국무위원회 부장 일행이 지난 20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호찌민 주석 묘소를 방문해 주위를 점검하고 있다. 이날 김 부장 일행은 주석묘 입구에서 10분 가량 머물며 동선을 체크했다. 이로 미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배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호 주석은 1957년 평양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은 1968년과 1964년 베트남을 찾았다. 호 주석은 오는 9월 2일 서거 50주년을 맞는다. [연합뉴스]](/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50ccbee58f04808c5699626db5d43705.jpg)
김창선 북한 국무위원회 부장 일행이 지난 20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호찌민 주석 묘소를 방문해 주위를 점검하고 있다. 이날 김 부장 일행은 주석묘 입구에서 10분 가량 머물며 동선을 체크했다. 이로 미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배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호 주석은 1957년 평양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은 1968년과 1964년 베트남을 찾았다. 호 주석은 오는 9월 2일 서거 50주년을 맞는다. [연합뉴스]
1968년의 구정 대공세는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역설적이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게릴라전의 고전인 야간기습을 중심으로 공격했지만, 게릴라전의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소화기만 지닌 대규모 게릴라 병력이 도시의 정규군을 공격하는 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외국군은 처음엔 의외의 기습공격 허를 찔리는 듯했지만 이내 전투를 주도했다. 전투 결과는 북베트남에 절망적이었다. 9월까지 4만5000명 정도의 병력을 잃었으며 특히 남베트남에 침투했던 게릴라 병력은 거의 궤멸해 씨가 마를 지경이 됐다. 전투에선 처절한 패배였다.
![구정 대공세로 민간인이 살상되고 시가지가 파괴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은 남베트남 도시.[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0c64c2f42f1b5a50340549e279621822.jpg)
구정 대공세로 민간인이 살상되고 시가지가 파괴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은 남베트남 도시.[중앙포토]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노렸을까. 이 전투를 통해 남베트남군과 연합군, 그리고 남베트남 국민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는 있었다. 특히 이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설날 새벽에 공격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는 편안한 밤이 없다’는 경고를 날리는 효과를 주기에 충분했다. 호찌민 주석과 보응우옌잡 장군은 군사력으로는 전투에 이길 수는 없지만 이런 효과는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을 수 있다. 군사력이 우수한 남베트남과 미국에서 먼저 ‘전쟁 대신 평화’라는 비명이 터져 나오면 군사력이 열세인 북베트남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민중 봉기를 유발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1968년 당시 서독의 서베를린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대시위. 구정 대공세로 전 세계에 베트남전의 참혹한 모습이 전해지면서 미국과 유럽에선 반전 분위기가 확산했다. [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f6237adfad2c35b499e1dc7e0ca2144e.jpg)
1968년 당시 서독의 서베를린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대시위. 구정 대공세로 전 세계에 베트남전의 참혹한 모습이 전해지면서 미국과 유럽에선 반전 분위기가 확산했다. [중앙포토]
이 전투를 계기로 특히 미국에선 전쟁에 싫어하고 염증을 내는 염전(厭戰)과 혐전(嫌戰)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반전을 입에 달고 다니지 않으면 아니면 지성인이 아닌 거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를 징집해 베트남에 파병하고 항공모함과 전폭기·폭격기 등 고가의 첨단 무기체계까지 동원해 북베트남을 폭격했는데도 그들의 군사력을 궤멸하지도, 전쟁 의지를 꺾지도 못하고 그렇게 기습 공격까지 당했느냐는 비난이 줄을 이었다. 미국은 구정 대공세라는 전투에 이기고도 내부의 적에게 등을 찔린 형국이 됐다.
![1973년 파리 평화협정 당시 만난 미국의 헨리 키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앞줄 오른쪽)과 베트남 공산당의 레득토 대표(왼쪽). 두 사람은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레득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평화협정 체결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종전 선언, 미군 철수 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공세를 강화해 1975년 4월 30일 무력 적화통일을 이뤘다. [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3afb14dfdc485bd3b7feb15a37c5e45f.jpg)
1973년 파리 평화협정 당시 만난 미국의 헨리 키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앞줄 오른쪽)과 베트남 공산당의 레득토 대표(왼쪽). 두 사람은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레득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평화협정 체결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종전 선언, 미군 철수 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공세를 강화해 1975년 4월 30일 무력 적화통일을 이뤘다. [중앙포토]
1978년 노벨평화상은 파리평화협정의 공로로 당시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와 베트남의 공산당의 남부 중앙국 부서기였던 레득토(黎德壽·1911~1990년)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레득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남베트남 패망 하루 전인 1975년 4월 29일 사이공 미국 대사관에서 800m 떨어진 미국 중앙정보국(CIA) 직원 숙소에서 미국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탈출 헬기를 타려고 옥상으로 오르고 있다. 이 사진은 남베트남 패망을 상징하는 장면의 하나가 됐으며 런던과 뉴욕에서 공연한 인기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남베트남은 이렇게 사라졌다.[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20ca84190976732467c730ec4a63680e.jpg)
남베트남 패망 하루 전인 1975년 4월 29일 사이공 미국 대사관에서 800m 떨어진 미국 중앙정보국(CIA) 직원 숙소에서 미국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탈출 헬기를 타려고 옥상으로 오르고 있다. 이 사진은 남베트남 패망을 상징하는 장면의 하나가 됐으며 런던과 뉴욕에서 공연한 인기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남베트남은 이렇게 사라졌다.[중앙포토]
![1975년 부산항에 도착한 베트남 난민. 부산 대신동 부산여고 자리에 수용된 이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아무 쓸모 없는 종이조각이 된 남베트남 지폐를 대량으로 뿌리기도 했다. 한국에 도착했던 베트남 난민 대부분은 몇 년 안에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서방 국가로 이주해 정착했다. [중앙포토]](/user/zbxe/files/attach/images/20877/603/059/f78830f105a96f19ee1c368aec812f9d.jpg)
1975년 부산항에 도착한 베트남 난민. 부산 대신동 부산여고 자리에 수용된 이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아무 쓸모 없는 종이조각이 된 남베트남 지폐를 대량으로 뿌리기도 했다. 한국에 도착했던 베트남 난민 대부분은 몇 년 안에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서방 국가로 이주해 정착했다. [중앙포토]
키신저는 유사시 남베트남을 지원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68년 북베트남의 호찌민 주석과 보응우옌잡 국방부 장관이 벌였던 구정 대공세는 결국 이런 결과를 빚었다. 전쟁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의지와 심리전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베트남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오는 27~29일 벌이는 정상회담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394129?cloc=joongang|home|newslist1#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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