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틀릴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씩 틀리더라도 자신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체로 다른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대체로 옳다’고 여기는 자신감이 쓸데없이 과한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자신의 지적 한계에 대해 인식하는 특성을 ‘지적 겸손’이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연구들에 의하면 이는 꽤 안정적인 특성이라서 지적 겸손도가 높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한 가지 설명(보통 자신의 시각)에만 매몰되어 있기보다 서로 다른 다양한 시각에 열려 있는 편이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일도 비교적 적다. 복잡한 현상에 대해 지나친 단순화나 과한 일반화를 좋아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양한 층위의 원인들을 파고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와 달리 지적 겸손도가 낮은 사람들의 경우 보통 자신의 시각에 지나치게 과한 가중치를 두고 자신의 의견과 비슷한 의견만 골라서 듣는 경향이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비교적 흔하게 나타나고 문제의 복잡함에 반해 지나치게 ‘간단명료한 설명’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지적 겸손도에 따라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달라지기도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이 명확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나마 지적 겸손도가 낮은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사람들은 지적 겸손도가 낮기보다 높은 사람들의 의견을 더 잘 청취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의 경우에도 지적 겸손도가 높을 때(또는 높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이 더 과학자들이 한 연구 내용을 신뢰한다는 발견들이 있었다. 또 조직 내에서도 리더의 지적 겸손도가 높을 때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 창의적인 결과물들이 더 많이 나온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었다.
비교적 ‘정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그렇지만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입장이 상충하는 사회적 문제나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상황에서도 지적 겸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나 코에트키 피츠버그대 연구자의 연구에 의하면, 지적 겸손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다양한 ‘갈등’ 상황을 더 잘 해쳐나가는 편이다.
지적 겸손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갈등 상황에서
① 긍정적 정보 전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② 긍정적 회피: 사람들이 여러 대안을 더 잘 검토할 수 있도록 문제를 차후 다시 논의하자고 제안
③ 긍정적 개방: 어떤 해결책을 제안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살핌
④ 긍정적 연대: 함께 마음을 모아 해결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건설적인 행동을 더 자주 한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반면 지적 겸손도가 높은 사람들은 지적 겸손도가 낮은 사람들에 비해
⑤ 부정적 공격: 상대방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거나
⑥ 부정적 회피: 갈등이 불편해서 침묵을 지키거나 대화 주제를 바꾸는 등의 해로운 행동은 덜 하는 편이라고 보고했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첨예한 국가 간, 집단 간 갈등 상황에서도 지적 겸손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양쪽의 입장에 좀 더 균등한 관심을 보이고 팔이 안으로 굽기보다 외집단 사람들의 피해 상황과 고통에 대해서도 인지하며 폭력적이기보다 대화를 통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발견들이 있었다.
점점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에서 꼭 ‘한 가지 정답’만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부딪히는 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이 반드시 옳거나 특히 내 생각만 옳을 가능성은 아마 매우 적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 이런 지혜를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내가 반드시 옳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의 지적 겸손도를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왜?”, “어쩌다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집에 불이 나거나 실직을 하는 등 부주의나 실수 같은 개인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큰 병에 걸리는 것처럼 항상 뚜렷한 원인이나 책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문제들에 대해서도 나름 원인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물론 나쁜 일에 대해 어떤 원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은 유용할 때가 많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야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비슷한 나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최소한 자신의 힘으로 나쁜 일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는 ‘통제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런 노력이 개인에 대한 지나친 비난과 구조적인 문제를 감추고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예측 가능하고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세상에는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고(예> 불경기, 운) 한 치 앞도 살필 수 없는 것이 삶이지만 노력하고 착하게 살면 나쁜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상은 대체로 공정하다는 믿음(Belief in a Just World)이다.
이 믿음 덕분에 그렇지 않은 사례들이 즐비함에도 내가 하는 행동들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의미감과 잘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착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닥치는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게 되기도 한다. 재난 뉴스에 “그러게 거기 왜 갔냐”는 댓글들이 달리고 무고한 피해자에게 “걔도 뭔가 잘못을 했을 거다”라는 추측과 2차 가해가 따라붙는다.
자신의 통제감과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 문제들, 예를 들어 ‘가난’에 대해서도 빈부격차나 높은 물가와 실업률, 낮은 임금 같은 문제들을 전부 ‘게으름’ 같은 개인 내적 문제로 환원시키기도 한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개인 내적·외적 요소들이 얼키고설켜 만들어지고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이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것들을 너무 단순하게 축소시켜 버린다. 그러다 보니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놓치고 괜한 사람들만 비난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을 종결시키고 만다.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믿음은 동기부여에 도움이 된다는 이점이 있지만 특히 ‘남들도 대체로 자신에게 걸맞은 결과를 얻는다’는 믿음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 게으르거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낙인을 찍는 것이나 이미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을 더 차별하고 처벌하려는 행동과 관련을 보인다.
나의 상황과 타인의 상황이 전혀 다를 수 있고 내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삶의 문제들을 입체적으로 다각도에서 분석하는 데에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어쩌면 생각보다 해결 방법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삶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고 많은 문제들이 개인 내적·외적 요소들에 걸쳐 복잡하게 꼬여 있으며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차원의 문제들도 존재함을 인정하면 적어도 타인의 삶을 쉽게 판단하는 행동은 삼가게 되지 않을까?
연구들에 의하면 ‘지혜로운’ 사람들의 경우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임을 아는 편이다. 이 세상에 단순하고 간단한 문제란 없음을 기억해야겠다.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나는 언젠가 분명 ‘명령적(Imperative) 프로그래밍 vs 선언적(Declarative) 프로그래밍’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당연히 검색해봤지만, 그 때마다 요런 정의 정도만 접해볼 수 있었다.
명령형(절차적) 프로그래밍은 당신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고,
선언적 프로그래밍은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명령형과 선언형의 차이를 이미 알고 있었더라면 이 정의가 명확하게 다가왔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데,
아마 직관적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할 만큼 명확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개발자들이 여기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유와 실제 코드를 조합해서 설명해주는 것이었다고 하니,
해당 방법으로 ‘명령형 vs 선언적 프로그래밍’이라는 주제를 다뤄보도록 하자.
우선, 위에서 언급했던 저 ‘어떻게, 무엇을’에 관한 정의는
사실 ‘명령형 vs 선언형’의 핵심을 담고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의 관점에서 잠깐 벗어나 현실에서의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자.
■ Red Lobster
당신은 회사에서 너무 오랜 시간 자바스크립트를 다루느라 피곤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달래기 위해 퇴근 후에 아내와 함께 ‘Red Lobster’ 식당에 근사한 데이트를 하러 갔습니다.
당신은 Red Lobster에 도착했고, 프론트 데스크에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명령형 접근(HOW): “저기 Gone Fishin’ 이라고 적힌 표지판 아래에 있는 테이블이 비어있네요.
우리는 저기로 걸어가서 저 테이블에 앉도록 하겠습니다.”
선언형 접근(WHAT): “2명 자리 주세요.”
명령형 방식은 내가 실제로 자리에 어떻게 앉을지에 관심이 있다.
이를 위해 나는 내가 어떻게 테이블을 잡아서 자리에 앉을지에 관해, 필요한 단계들을 하나하나 나열해야 한다.
반면, 선언형 방식은 오로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여기서 말한 ‘두 명을 위한 테이블’ 처럼.
■ Wal-Mart
친구가 당신의 집에 집들이를 오기 위해 Wal-Mart에서 선물을 샀습니다.
현재 친구는 Wal-Mart 바로 옆에 있으며, 당신의 집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를 전화로 물어봅니다.
이에 관한 명령형 대답과 선언형 대답을 모두 생각해보세요.
명령형 접근(HOW): “주차장 북쪽 출구로 나와서 좌회전을 해. 12번가 출구에 도착할 때까지
I-15 북쪽 도로를 타고 와야 해. 거기서 IKEA에 가는 것처럼 출구에서 우회전을 해. 그리고 거기서
직진하다가 첫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을 해. 그 다음에 나오는 신호등을 통과한 후에 좌회전을 하면 돼.
우리 집은 #298 이야.”
선언형 접근(WHAT): “우리 집 주소는 298 West Immutable Alley, Eden, Utah 84310 이야.”
추가로 한 가지 비유를 더 하자면, 수동 스틱 자동차와 오토 스틱 자동차를 예로 들 수 있다.
친구가 ‘우리 집에 어떻게 도착하는가’ 와는 별개로, 친구가 어떤 차를 운전하느냐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동 스틱(1종)은 명령형 방식이고 오토 스틱(2종)은 선언적 방식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차를 운전하겠는가?
실제 코드로 예시를 들기 전에, “자리에 앉는 방법은 누가 알지?”,
“주소는 아는데, 집에 가는 방법은 누가 알지?”와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선언적 방식의 접근을 위해서는 명령형 방식으로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관한 내용이 먼저 추상화 되어있어야 한다 라는 것.
Red Lobster 직원에게 사용했던 선언형 접근(“2명 자리 주세요.”)에는, Red Lobster 직원이
‘테이블에 어떻게 앉는가’에 관한 모든 명령형(절차적) 단계들을 알고 있다는 가정이 뒷받침되어 있다.
친구에게 우리 집의 주소를 알려주는 것도, 친구가 ‘우리 집에 어떻게 도착할 수 있는가’에 관한 명령적 절차들을
모두 알고있는 일종의 GPS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오토 스틱(2종) 자동차는 변속 기어에 대해 일종의 추상화 계층(Layer)을 가지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다음의 문장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다.
많은 선언적(Declarative) 접근 방식들의 기반에는 일종의 ‘명령적(Imperative) 추상화’가 존재한다.
이제, 여러가지 비유로 떡칠된 예시들을 졸업하고 현실 세계의 코드 예시를 살펴볼 차례이다.
그 전에, ‘선언적 프로그래밍 언어’와 ‘명령적 프로그래밍 언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명령적 언어: C, C++, Java
선언적 언어: SQL, HTML
(Can be) Mix: Javascript, C#, Python
우선, 대표적인 선언형 언어인 SQL과 HTML의 코드를 살펴보자.
SELECT * FROMUsersWHERE Country='Mexico';
<article><header><h1>Declarative Programming</h1><p>Sprinkle Declarative in your verbiage to sound smart</p></header></article>
이 두 가지 예시 모두 문법만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선언형 프로그래밍이며, 어떤 일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보다는 무엇을 수행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관해서만 묘사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SQL 예시에서는 멕시코에 거주하는 모든 유저들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한 구현’은 우리에게서 추상화되어있다.
HTML 예시에서는 ‘웹 브라우저가 어떻게 article 엘리먼트를 파싱해서 화면에 보여주는가’는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WHAT은 오직 ‘멕시코 유저들‘과 웹사이트의 ‘header와 paragraph‘이다.
지금까지는 충분히 알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조금 더 실전적인 자바스크립트 예제로 들어가보자.
■ 기술 면접
당신은 현재 기술 면접을 보는 중이고, 나는 해당 기술 면접의 interviewer입니다.
콘솔창을 열고, 제가 묻는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작성해보세요.
1. 숫자 배열을 받아서, 해당 배열의 모든 원소들을 두 배 시킨
새로운 배열을 리턴하는 ‘double’이라는 이름의 함수를 작성하세요.
ex) double([1, 2, 3]) // [2, 4, 6]
2. 숫자 배열을 받아서, 해당 배열의 모든 원소들을 더한 값을 리턴하는 ‘add’라는 함수를 작성하세요.
ex) add([1, 2, 3]) // 6
3. jQuery나 Vanilla Javascript를 이용해서, btn이라는 id를 가진 엘리먼트에 이벤트 리스너를 달아보세요.
해당 버튼을 클릭했을 때 highlight라는 class를 toggle(add or remove)해야 하고,
엘리먼트의 현재 상태에 따라 버튼의 텍스트를 ‘Add Highlight’와 ‘Remove Highlight’로 바꿔야 합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가장 흔히들 작성하는 ‘명령적’ 코드들을 먼저 살펴보자.
functiondouble (arr) {
let results = []
for (let i = 0; i < arr.length; i++){
results.push(arr[i] * 2)
}
return results
}
functionadd (arr) {
let result = 0for (let i = 0; i < arr.length; i++){
result += arr[i]
}
return result
}
$("#btn").click(function() {
$(this).toggleClass("highlight")
$(this).text() === 'Add Highlight'
? $(this).text('Remove Highlight')
: $(this).text('Add Highlight')
})
무엇이 이 코드들을 명령적으로 만드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코드들에서 공통점을 뽑아내야 한다.
1. 가장 명백한 공통점은 이들이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는 것.
각각의 예시에서, 우리는 명시적으로 배열을 반복하거나(for 문),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단계들을 명시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2. 각각의 예시에서 우리는 ‘상태(state)의 일부’를 변경하고 있다.
(상태: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에 대한 정보. 변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됨)
처음 두 예시에서는 ‘results’라는 변수를 만들어 그것을 계속해서 수정하고 있다.
세 번째 예시에서는 아무런 변수도 없지만, 여전히 DOM 자체에 state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해당 코드는 DOM의 state를 수정하고있다.
3. 약간 주관적이지만, 위의 코드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위의 코드들을 한 번 슥 훑어보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알아채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코드가 존재하는 맥락을 고려해가며, 해당 코드들을 인터프리터처럼 차근차근 살펴봐야 한다.
처음 두 예제에서, 자바스크립트의 내장 함수인 map과 reduce를 활용한 레버리징에 주목하자.
이는 이 글 내내 반복해서 언급했던,
‘가장 효율적인 선언적 프로그래밍 방법은 명령적으로 작성된 코드를 추상화하는 것이다‘
라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해당 예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지보다, 무엇을 원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map과 reduce가 어떻게 구현되어있는지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우리는 아무런 state도 변경하지 않는다. 모든 변경들은 map과 reduce 내부에 추상화되어있다.
그리고 당신이 map과 reduce에 익숙하다는 가정 하에, 훨씬 더 가독성이 좋다.
이제, 마지막 예제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약간의 편법으로 리액트를 사용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명령형의 세 가지 문제점들이 모두 해결이 되었다는 것.
리액트의 진정한 강점은 이러한 선언적인 방식으로 UI를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Btn 컴포넌트를 보면, 해당 UI가 어떤 식으로 보일지를 빠르게 알아챌 수 있다.
또 다른 강점은 state가 DOM에 존재하는 대신, 우리가 만든 리액트 컴포넌트 자체에 존재한다는 것.
선언적 프로그래밍의 또 다른, 덜 알려진 장점 중의 하나는
우리의 프로그램이 context-independent 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 상황에 좀 더 독립적이다)
선언적 코드들은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해당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세부적인 단계들(해당 목표에 의존적인 과정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
그래서 동일한 코드들이 다른 프로그램에 쓰이더라도 정상적으로 동작할 수 있게 된다.
당장 위의 세 예시만 보더라도, 저 함수들이나 컴포넌트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갖다붙여도 정상적으로 동작한다.
저들은 현재 어떤 프로그램에 속해있는가 하는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명령형 코드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명령형 코드들이 현재 상태의 컨텍스트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재사용하기가 어렵다)
이 글의 저자는, 선언적 프로그래밍에서 더 나아가 함수형 프로그래밍까지 다뤄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map, reduce, filter를 사용해보면서 차근차근 시작하라고 하는데, 함수형 프로그래밍에 관해서도
조만간 한 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듯.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선언적 프로그래밍은 절차적 구현을 추상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
선언적 프로그래밍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좀 더 감을 잡을 수 있게 해준 내용인 듯.
리뷰어분들께서 말씀하시는 ‘재사용성’이나 ‘순수 함수’에 관한 것들이 약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최대한 독립적이고 재사용성이 높은 함수들을 구현하여, 해당 함수들의 조합으로 프로그래밍을 구성하면
전체 코드의 유지보수가 쉬워지고 가독성도 훨씬 높아지겠지. 그게 말처럼 쉽겠냐마는..
아래는 저자가 웹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선언적 프로그래밍의 또 다른 정의들.
Declarative programming is “the act of programming in languages that conform to the mental model of the developer rather than the operational model of the machine.”
선언적 프로그래밍은 “기계의 동작을 모델로 하는 것이 아닌, 개발자의 두뇌(정신, 생각)를 모델로 본딴 언어를 가지고 프로그래밍 하는 것” 이다.
Declarative Programming is programming with declarations, i.e., declarative sentences.
선언적 프로그래밍은 선언(선언적 문장, 선언문)들을 사용해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
The declarative property is where there can exist only one possible set of statements that can express each specific modular semantic. The imperative property is the dual, where semantics are inconsistent under composition and/or can be expressed with variations of sets of statements.
선언적 속성이란, 특정 모듈을 설명하는 문장 집합이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령적 속성은 이중적이고, 이는 의미들의 구성에 일관성이 없고 여러 가지 문장 집합들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Declarative languages contrast with imperative languages which specify explicit manipulation of the computer’s internal state; or procedural languages which specify an explicit sequence of steps to follow.
선언적 언어는 컴퓨터의 내부 상태를 명시적으로 조작하는 명령형 언어, 또는 밟아야 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명시적으로 지정하는 절차적 언어와 반대된다.
In computer science, declarative programming is a programming paradigm that expresses the logic of a computation without describing its control flow.
CS에서 선언적 언어는 제어 흐름을 설명하지 않고, 계산 로직을 표현하는 패러다임(개념)이다.
I draw the line between declarative and non-declarative at whether you can trace the code as it runs. Regex is 100% declarative, as it’s untraceable while the pattern is being executed.
나는 코드의 실행을 추적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선언형과 비선언형을 구분한다.
정규표현식(Regex)은 패턴이 실행되는 동안 그것을 전혀 추적할 수 없기 때문에 100% 선언적이라고 할 수 있다.
+ Zereight’s Blog에서 본 인상적인 설명
명령형 프로그래밍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 컴퓨터에게 명시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방법을 의미하고,
선언형 프로그래밍은 무엇을 해결할 것인지에 보다 집중하여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에 대해서는
컴퓨터에게 위임하는 방법이다.
처음 프로그래밍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을 떄부터, 지금까지도 컴퓨터에게 명시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방법인
명령형 프로그래밍을 주로 사용했지만, 함수형 프로그래밍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더 집중하고
사소한 작업은 컴퓨터에게 넘겨버리는 선언형 프로그래밍의 일종이다.
즉, 컴퓨터에게 사소한 작업들을 위임해버리는 패러다임의 특성 상
선언형 프로그래밍에는 필연적으로 높은 수준의 추상화라는 키워드가 붙는다.
추상화 수준이 낮다면 저 사소한 작업들을 개발자가 일일이 다 컨트롤해야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늘 자신에 대해 불만이 많고 자신은 부족함 투성이라고 하는 지인이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부족함은 당연히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에 못지 않게 멋진 점도 엄청 많은데 그것들을 다 제쳐두고 자신에게 없는 부족한 것들만 바라보며 우울감에 빠져드는 편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개인 내적인 문제들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소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한참 성취도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만 둘러싸여 있는 것이 한 몫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이야기할 때 항상 ‘다른 사람들은’, ‘직장 동료 누구는’ 무엇 무엇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이었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 성취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쓸모 있는 사람인지를 가늠한다. 예를 들어 모두가 10 정도를 하고 있는 사회에서 나 혼자 6을 하고 있다면 좀 더 분발해야겠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15를 하고 있다면 이미 잘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문제는 비교가 ‘의미 없는’ 문제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수학 능력에 대해 파악하고 싶다면 주변 사람들에 비해 나의 수학 점수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것이 조금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내 내면세계의 풍부함, 생각의 깊이, 오늘 나는 행복했는지 같이 객관적인 기준보다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에 있는 문제들은 비교가 유용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또 도움이 되는 비교라고 해도 정도껏, 딱 1절까지만 해야 하는데(성취도가 좀 부족한 것 같으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계속해서 온갖 것에 대해 비교하며 나는 왜 이렇게 남들에 비해 부족한지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인 게 아닐지 등등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으로 빠져들고 우울감과 무력감에 허우적 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숨쉬듯이 비교를(불필요한 영역에서+지나치게) 하다 보니 웬만하면 비교하지 말라는 조언들을 듣게 된다.
하지만 주변에 성취도가 너무 높은 사람들만 잔뜩 알고 있거나 이런 사람들에게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비교의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이 보다 어려운 일이 된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부러워할 때면 보통 겉으로 보이는 한 두 가지 반짝이는 면에만 꽂혀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 삶의 이면에 어떤 모습이 있는지는 보통 신경 쓰지 않을 때가 많다.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에는 피상적인 정보를 전체로 일반화 해서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삶을 불만족스러워 할 때에는 좋은 부분도 많지만 싫은 부분도 많기 때문에 나쁘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내가 그러하듯 내가 부러워 하는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들도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머리가 복잡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누구한테 어떤 좋은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소문들도 쉽게 부럽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살아가면서 겪는 특별히 좋은 일이란 보통 아주 가끔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삶은 긴 일상들이 연속되는 ‘시간’이고 매일 특별함으로 가득한 날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설령 늘 좋은 일이 생긴다 해도 인간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금방 적응하는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에는 아주 좋아 보였던 것도 막상 가지고 나면 처음의 기쁨은 금새 없어지고 다시 평범하고 당연한 무엇이 되기 마련이다. 감정은 어떤 종류이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그라드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생존에 크게 위협받는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 어떤 몇 가지 거대한 이벤트로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행복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좋을 것 같은 일도 대략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의 감정 상태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만다.
이러한 점 때문에 행복으로 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즐거움의 크기를 계속해서 늘리기보다 기준점을 낮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예를 들어 매일매일 달콤한 디저트를 먹기보다 가끔씩 먹는 것이 더 먹는 즐거움을 오래도록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는 매일매일 생일파티를 하는 것보다 일년에 한 번 하는 것이 더 생일파티의 즐거움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누군가는 생일 파티를 매일 하는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행복에 있어서는 크게 부러워할 필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많은 연구들이 자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저주, ‘자신에 대한 생각’ 외에 더 중요할 수 있는 것들(예를 들어 눈앞에 있는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기, 다른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관심 갖기)이 잘 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자기 과몰입(self-preoccupation)이 불행의 주원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다가도 ‘과연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같은 생각을 시작하면 얼마든지 갑자기 내 인생은 망한 것 같다는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며 깊은 우울감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실제로 지나친 자기 집중,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은 우울증과 깊은 관련을 보인다.
자기 몰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기중심성(egocentrism),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안녕을 중시하는 이기심(egoism),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며 남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타율성(heteronomy) 등이 흔히 나타난다.
이에 반해 마크 리어리 듀크대 심리학자 등의 연구자들은 저(低) 자기 몰입(hypo-egoic) 상태가 우리 삶 속에 불필요한 불행을 줄여주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으로는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의 상황에 더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들여다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추상적이고 과장된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준에서 바라보고(예를 들어 나는 성공한 인간인가? 같은 추상적인 질문보다 오늘 하루 즐거웠나?라고 묻기) 다른 사람의 평가를 덜 신경 쓰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저(低) 자기 몰입 상태는 자기 과몰입 상태에 비해 나나 내 집단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돕고 기존의 자아상이 위협을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 좀 더 적응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돕는다.
● 자기 자비, 수용, 그리고 회복탄력성
자기 과몰입 상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경직된 자아관’이다. 이상적인 삶, 이상적인 나의 모습은 적어도 얼마를 벌어야 하고 어떤 배경들을 가져야 하며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등 촘촘하고 세세한, 때로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자아관을 강하게 밀고 있기 때문에 작은 실패에도 금방 부러지고 만다.
‘○○하지 않으면 살 필요가 없어’ 같은 생각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함정처럼 촘촘한 그물을 짜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작은 일에도 나라는 사람 전체가 쉽게 꺾이는 듯한 일반화된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아관이 경직되어 있을수록 자신의 실패를 잘 인정하지 못하고 ‘내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 탓’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해 버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여기에 자기 자비(self-compassion)가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 자기 자비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인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예를 들어 물론 슬프지만 인간인 내가 실수하고 일을 망치는 건 당연한 일), 힘들어하는 친구를 대하듯 자신에게도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힘들어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곧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성급함에서 한 발 물러나 좀 더 넓은 상황을 바라보며 인간일 뿐인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어려움들을 가지고 있음을 힘들다는 것은 내가 멍청하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뜻할 뿐임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많은 연구들이 특히 경직된 사회적 기준을 내면화해서 경직된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비가 불필요한 괴로움을 줄여주고 보다 쉽게 마음의 평화를 가지도록 돕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힘든 것이 인간으로서 겪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뜩이나 힘든데 더 윽박지르고 더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보다는 위로와 친절, 내가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과몰입에서 한 발 물러서서 자기 비판적인 생각을 “진짜 나의 본질”로 여기지 않고 단순히 어려움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 기억해 보자.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한 분이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 창밖에서 홀딱 젖은 새를 보고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내 부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춥고 축축한 게 싫겠지만 새는 “아 정말 오늘 날씨 왜 이래. 춥고 축축해서 짜증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살기 싫다!” 같은 피곤하고 파괴적인 자기 대화(self-talk)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더 괴로운 것 같다는 얘기였다.
‘자아의 저주(The curse of the self)’라는 말처럼 인간은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시시각각 평가적이고 말이 많은 자아를 가진 탓에 이미 존재하는 삶의 괴로움에 더해 자아가 만들어낸 괴로움까지 추가로 지고 살아간다.
개미들도 부지런히 일하느라 힘들겠지만 자신이 다른 개미들보다 뒤쳐지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함, 인플루언서 개미가 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오는 자괴감, 자신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 등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가만히 잘 있다가도 불안감이 엄습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일은 잘 겪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남들과 다른 ‘나’에 대해 생각하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 하나 세세히 평가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며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정신적 기능을 ‘자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모니터링하고 자아 성찰, 미래에 대한 계획 세우기 등이 가능해진 덕분에 장기적 목표 달성 같은 것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물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해로울 수 있는 것처럼 뭐든지 지나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아도 마찬가지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될 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평가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 대한 생각’ 외에 더 중요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눈 앞에 있는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귀 담아 듣기, 다른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관심 갖기 같은 것이 잘 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현상(self-preoccupation)이 나타난다.
또 세상 모든 일을 내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기중심성(egocentrism), 다른 사람들보다 나의 안녕을 중시하는 이기심(egoism),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다가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 남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타율성(heteronomy) 등이 흔히 나타난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과한 주의를 기울이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에 불과한 것에 심하게 집착하는 상태를 ‘과도한 자기 몰입(hyper-egoic states)’이라고 부른다.
이미 많은 종교와 철학적 가르침들이 자아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한 발짝 떨어져 있을 것을 강조해왔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자아상에 대한 집착이 갈망, 분노, 질투의 근원이라고 보고 명상 등을 통해 자기 대화를 잠재우는 법을 가르쳐왔다.
신기하게도 과학적 발견들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으로서 갖는 본질적인 부족함들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품어보는 자기자비(self-compassion), 자신의 지식과 자아를 분리해서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래도 괜찮다고 할 줄 아는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 힘들 때 ‘나만’, ‘내가 제일’ 고통받고 있는 것 같다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인생은 원래 어느 정도 고통을 내포하고 있고 사람들은 다 각자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줄 아는, 고통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 등이 행복과 정신 건강, 평정심, 회복탄력성, 이타심과 자비로운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알더라도 우리의 자아는 여전히 말이 많고 대체로 안 좋거나 편향되어 있는 말을 쏟아낸다. 그래봤자 내 머리 속에 떠다니는 말들일 뿐이지만 깨어 있는 동안 계속해서 듣게 되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실’로 여기고 우울이나 불안에 빠져든다.
자아만큼 나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전문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게 또 있을까. 안타깝게도 자아는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인 동시에 가장 무서운 적인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자아가 하는 말을 적당히 걸러 듣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시도가 필요하다. 명상이든 운동이든 맛있는 거 먹기, 영화 보기, 또는 친구와의 진솔한 대화가 되었건 내 자아로부터 한 발짝 떨어지게끔 도와주는 활동이 있다면 정기적으로 해보도록 하자.
바로 어제만 해도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해 보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꿀잠을 자고 나니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나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시간들을 가져보도록 하자.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