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정부가 15일 1조4600억 달러(약 1734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충격을 방어하는 차원이다. 최근 인도에선 경제활동이 곳곳에서 중단된 영향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장 상황은 나쁘지만, 중장기 성장 전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망이다. 인도가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글로벌 생산기지로 부상하면서다.
인도 경제성장. 셔터스톡
한국은행이 16일 ‘인도 경제 성장배경 및 코로나19 이후 전망’ 보고서를 내놨다. 일단 코로나19로 인해 인도 경제의 단기적인 성장세 둔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인도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최근 250만명을 넘어섰다. 미국·브라질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사망자도 영국을 제치고 세계 4위가 됐다. 확산 초기엔 강력한 봉쇄조치(3월 25일~5월 3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일평균 확진자 수가 5만명 이상으로 늘었다.
당장 봉쇄조치 기간에만 취업자 수가 1억명 이상 줄었다. 산업생산은 4월 전년 동기 대비 57.6%나 줄어든 뒤, 5월에도 큰 폭으로 감소(-34.7%)했다. 주욱 한은 아태경제팀 과장은 “소비 및 투자 위축의 장기화가 불가피해 회복 속도가 더딜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인도의 경제성장률을 -4.5%로, 세계은행은 -3.2%로 전망했다.
1991년 개방 경제체제로 전환한 인도는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콜센터 같은 정보기술 기반 아웃소싱 서비스업(IT-BPO)의 고성장, 제조업 생산능력 확충, 소매금융 활성화를 통한 내수시장 확대가 비결로 꼽힌다. 특히 2014년 세계 10위권에 도달한 이후 2019년까지 연평균 성장률(6.84%)은 중국(6.81%)보다 앞설 정도로 탄탄한 흐름을 보였다. 이런 성장세가 코로나19로 확 꺾인 셈이다.
감속은 불가피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전망은 여전히 밝다. 일단 인구를 바탕으로 한 성장 잠재력이 탁월하다. 인도의 인구는 2027년 중국 추월해 세계 1위에 올라설 전망이다. 주 과장은 “구조 측면에서도 2040년까지 생산연령인구 비중이 꾸준히 높아진다”며 “고령층 부양 부담 축소와 높은 내수기여도 등 인구보너스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인구 증가가 경제성장에 따른 고용 개선 및 중산층 확대와 상승 작용을 할 것이란 분석이다.
인도 뭄바이의 스카이라인. 셔터스톡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글로벌 공급망(GVC)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이 커진 것도 기회다. 최근 많은 글로벌 기업은 공급망의 안전성 확보를 위해 생산기지를 중국 이외의 국가로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기존 중국 생산물량 중 약 20%를 인도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 애플이 대표적이다.
2014년 모디 정부 출범 이후 인도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메이드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을 추진 중이다. 철도·전력 등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과감하게 규제를 푸는 내용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의 사업용이성(Doing Business) 순위는 2014년 142위에서 지난해 63위로 79단계이나 상승했다. 주 과장은 “외국인 직접투자(FDI) 유치를 위해 중국에서 옮겨오는 기업에 생산 연계 인센티브와 세제 혜택을 늘리고 있다”며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체결되면 생산기지 이전이 더욱 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바탕으로 인도가 2029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일본경제연구센터)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한국과 인도의 교역액은 지난해 207억 달러(11위)로 전체 무역 규모의 2.0%를 차지한다. 전 세계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3.4%를 차지하는 인도의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교역이 활발하다고 보긴 어렵다.
인도 수입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3.3%, 한국의 해외직접투자에서 인도의 점유율은 0.7%에 그친다. 주 과장은 “인도의 글로벌 공급망 참여 확대에 따라 성장이 기대되는 중간재 및 자본재 시장 공략을 강화해야 한다”며 “또 가파른 소비 증가에 대응해 수출 품목 다변화로 인도 내수시장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단단한 친구관계를 지키려면 가치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대인관계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스턴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한 헨리 머레이(Henry Murray) 박사는 독성 있는 사람들은 4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 독을 퍼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1. 악성 나르시시스트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적극적이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매력을 가진 듯 보인다. 소유욕이 강하고 폭언을 하는 면이 있어 남을 통제하는 것에 능숙하다. 이런 점들이 언뜻 강한 리더십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특출한 이기주의와 특권의식에 가깝다.
때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이끌려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 주리라는 기대로 관계를 형성하지만 악성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신 외에는 타인을 사물 취급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2. Frenemy (이해관계로 인한 전략적 협력관계인 동시에 경쟁관계)
Frenemy · 프레너미는친구(friend)와 적(enemy)의 합성어다. 이런 관계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동료들이다. 일정 부분 협력관계를 요하지만 개인마다 성과를 내야 하는 경쟁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맥락에 따라 친구가 되기도 적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에 처세가 필요한 관계이다. 이들은 인간적인 관심을 주고받는 친구와 달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가치관을 달성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이해관계인이다.
영미권에서는 ‘fair-weather friend’라는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 친구란 뜻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친구를 자처하지만 곤경에 빠졌을 때는 모르는 척하는 동료를 말한다. 이러한 유형은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 독을 쏘는 표현이나 생각을 주입하기 때문에 어설프게 착한 보통의 사람들은 선의로 받아들이기 쉬우며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3. 만사에 부정적인 사람들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행동이 불규칙하고 종종 고집스러운 자기주장과 비난을 교묘하게 숨겨서 표현한다. 이들이 주로 취하는 행동은 ‘수동적 공격성’이다. 겉으로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재적으로 공격자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난 너의 이런 새 옷이 좋아, 이런 건 10년 전만 해도 인기가 많았겠지?”라고 말한다. 상대방은 칭찬 뒤에 모욕이 있음을 알아차렸더라도, “나는 그것이 좋다는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이들은 대개 만사를 냉소적이고 비관적으로 비꼬는 경향을 가진다.
4.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유혹적인 사람들
사람의 관심이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마치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행동한다. 과장된 정서 표현, 격렬한 대인관계, 자기중심적인 태도,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행위로 극적인 신체적 행동을 보인다. 작은 사건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반응하며, 행동이나 언어 표현이 미성숙하고 허영심이 많으며 감정표현을 많이 한다.
주변에 지나치게 요구를 하고 끊임없이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만날수록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며, 갈등을 자주 유발하여 인간관계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불안을 보상받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취하며 강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효용을 얻지 못하면 쉽게 관계를 저버린다.
사울
재위 BC 1037~1010년. 선지자 사무엘이 세운 유대 왕국의 첫 번째 왕. 양치기 소년이던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 후 사람들의 존경을 얻자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사무엘과 틀어진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해 자살한다.
발생론 “국가는 필요악, 견제해야”
목적론 “목표 위해 개인 희생 가능”
성추행, 검찰 흔들기…권력 사유화
“의회정치 무력화, 전체주의 비슷”
다윗
다윗
재위 BC 1010~970년. 유대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들은 솔로몬 왕이다. 블레셋의 전사 골리앗을 쓰러뜨려 영웅이 됐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다윗의 청년시절을 모델로 했다. 성서에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적 국가관
국가는 고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사진)는 국가가 개인의 행복과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국가를 지배계급의 착취 도구로 본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도 목적론적 국가관의 일종이다.
로크
발생론적 국가관
목적론적 국가관은 국가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권력의 주체는 시민이며, 국가는 그저 필요악일 뿐이다. 정치의 핵심은 국가의 권한을 견제하는 데 있다. 로크(사진) 등의 사회계약론이 대표적이다.
“너희의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고 딸은 시종을 삼을 것이다. 양을 키우고 밭을 갈아 모두 바칠 것이며 끝내 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왕을 원하는가?”
구약성경(사무엘기)에 기록된 선지자 사무엘의 예언입니다. 하늘에 왕을 내려달라던 유대인들의 기도에 대한 답변이었죠. 이들은 백성을 하나로 모아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열망했습니다. 사무엘은 ‘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유대인들은 강력한 국가의 꿈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왕이 된 이가 사울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성격이 오만하고 시기심이 커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습니다. 뒤를 이어 지혜로운 청년이 왕좌에 오르니, 바로 다윗입니다. 소년 시절 골리앗을 물리친 그는 인자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의 치세는 아들인 솔로몬까지 이어져 유대 왕국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구에르치노가 그린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1646년).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울은 백성들이 존경하는 청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 이야기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무엘의 경고처럼 국가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필요악’으로 보는 것이고요. 둘째는 다윗·솔로몬 같은 지혜로운 왕이 다스리며 국가가 ‘선한 의지’를 실현한다는 입장입니다. 두 국가관을 구분해 전자를 발생론, 후자를 목적론이라고 부릅니다.
목적론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정치학』에서 “국가의 목적은 인간의 선한 생활이며, 정치사회는 고결한 행동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시민 각자의 행복은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국가 권력은 개인의 권리에 우선합니다. 그의 이론은 계몽시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교회만큼이나 무소불위의 지위를 누려 철학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17세기 이후 많은 사상들이 그를 공격하며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서양철학사』)
선두에 섰던 이들이 사회계약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에 숭고한 목적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는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계약을 맺어 권한을 위임해 생겨났을 뿐”(홉스)이죠. 로크는 한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 헌법의 원리인 국민주권론을 강조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국민이 만들어 놓은 원칙, 즉 법에 의해서만 행사돼야 하며(법치주의) 만일 국가가 주권자의 의사에 반하면 사회계약을 해지할 수(저항권) 있습니다. (『통치론』)
로크의 이론은 몽테스키외로 이어져, 삼권분립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그는 입법·행정·사법 세 기관의 견제와 균형이 바탕 된 대의정치야말로 이상적 정치체제라고 봤죠. (『법의 정신』) 그의 사상은 미국 독립혁명의 근본이념이 됐고, 최초의 삼권분립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깬 사회계약론
선지자 사무엘의 유년을 묘사한 그림. 조슈아 레이놀즈 ‘어린 사무엘’(1776).
이처럼 국가의 존재 이유는 목적론에서 시작해 발생론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역사 발전의 주체를 ‘국가’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은 것과 같습니다. 시민의 권리를 강조한 미국 헌법의 첫 문장이 ‘We the People(우리 시민들)’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근대 이후 개인은 권력의 객체가 아니라 분명한 주체로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유교 전통과 공동체 이데올로기가 공고한 한국사회에선 목적론적 국가관이 여전합니다. K방역의 성공이 대표적인 예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사생활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서구에선 한국식 모델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독일의 슈피겔지는 K방역은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한 유럽에선 도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논평하기도 했죠.
물론 목적론적 국가관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탁월한 정치인’이 전제돼야 하죠. 국가에 ‘선한 의도’라는 인격을 부여하는 순간 통치자에게 지나친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때 통치자의 철학과 역량에 따라 ‘선한 의도’가 다른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절제’ 같은 정치가의 공적 역량이 시민보다 월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통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쓴 것도, 어린 왕세자를 경연을 통해 성군으로 길러내려 한 것도 같은 이유였죠.
그러나 현 집권세력은 선한 의도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정치인에게 필요한 공적 역량은 부족합니다. 정의의 기준부터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기편이냐 아니냐’에 놓여 있죠.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수사할 때는 성인처럼 떠받들다가, 대통령의 지시대로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했더니 만고의 역적으로 몹니다. 상대 정파의 조그만 흠집까지 적폐로 몰 때는 언제고, 조국·윤미향 사태에서 드러난 각종 편법과 범죄 의혹에 대해선 눈감습니다.
공사를 구분하는 절제 역량도 부족합니다. 공화국(republic)은 라틴어 ‘공적인 것(res publica)’에서 유래했습니다. 공화국의 리더는 높은 공공의식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신은 다주택자이면서 남들에게 집을 팔라고 하거나(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 투기세력을 비판해놓곤 재건축에 투자하면서(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조국에게 ‘마음의 빚’을 표명한 일도 공사 구분을 못했기 때문이죠.
말로는 ‘선한 의도’ 행동은 ‘편 가르기’
특히 최근 여당 지자체장들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시민이 부여한 공적 권한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데 불법적으로 사용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여권은 이를 옹호하는 듯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미화 발언은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합니다. 내 편이면 무조건 감싸주는 특유의 ‘내로남불’ 정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죠.
문명의 발전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식 국가관이 사회계약론으로 발전한 것은 통치자의 역량에 온 사회를 맡기는 것의 기회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역사엔 늘 세종 같은 성군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설령 최고 권력자가 높은 수준의 정의와 절제 역량을 갖고 있다 해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인까지 같다고 볼 순 없습니다.
반면 ‘국가=필요악’이고 개인을 권력의 주체라고 가정하면, 정치인은 시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일 뿐입니다. 시민은 주기적으로 대표를 교체하고 일상에서 비판적으로 정치인을 견제합니다. 이렇게 하면 권력자의 복불복 문제도 해결되며,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의 횡포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로크(국민주권)와 몽테스키외(삼권분립)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것이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의회정치를 강화하고 시민의 역량을 높이는 일입니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 특히 야당을 건너뛰고 지지자들만 등에 업고 독주하는 ‘직거래 정치’를 견제해야 합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다원적 체제인 대의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의 ‘총의(總意)’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도 필요합니다. 정치인에 대한 팬덤으로 맹목적 애정만 보낼 게 아니라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하죠. 과거 그의 집권 후 ‘노감모(노무현을 감시하는 모임)’로 역할을 바꾼 비판적 시민들처럼 말입니다. 현재 좌우 양극단의 지지자들처럼 ‘깨어있기’보다 ‘조직된 힘’에만 비중을 싣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얼마 전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거대 권력 앞에서 공정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호를 바랐던 정부·여당으로부터 또 다른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80년대 국가의 폭력에 맞서 제일 앞장서 싸웠던 그들에게 ‘국가란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권력자의 ‘선한 의도’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
게임을 통해 학습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게임 안에는 문학·과학·사회·상식 등 다양한 분야 숨은 지식이 있다. 게임을 잘 뜯어보면 공부할 만한 것이 많다는 이야기다. 오시영의 겜쓸신잡(게임에서 알게된 쓸 데 없지만 알아두면 신기한 느낌이 드는 잡동사니 지식)은 게임 속 알아두면 쓸데없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한 잡지식을 소개하고, 게임에 대한 이용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코너다. [편집자 주]
그라비티의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넥슨 ‘바람의나라’, 엔씨소프트 ‘리니지’와 함께 1세대 온라인게임 시절을 풍미했던 게임이다. 3D로 구성한 배경 위에 2D 도트 캐릭터를 표현하는 아기자기한 2.5D 그래픽으로 남성은 물론 여성 게이머에게도 사랑을 받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7일 나온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풀 3D 방식으로 한층 더 아기자기한 그래픽으로 업그레이드됐다. 11일 구글 플레이스토어 매출 10위에 오르며 장기 흥행의 발판을 마련했다.
라그나로크 오리진 게임 화면 / 오시영 기자
‘라그나로크’는 사실 북유럽(노르드) 신화에 나오는 종말 신화의 이름이다. 종말 신화는 천주교나 개신교 성서에 있는 요한묵시록(계시록)과 성격이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대 노르드어 라그나로크(ragnarǫk)에서 라그나(ragna)는 ‘지배하는 권력자나 신의 복수형’이며, 로크(-rǫk)·뢰크(-røkkr)는 형태 별로 전자는 ‘운명’, 후자는 ‘파멸, 황혼’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운명’, 라그나뢰크는 ‘신들의 황혼’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다.
라그나로크를 맞기 전 인간계(미드가르드)는 인륜(人倫)이 사라진 혼란기다. 해와 달이 사라지고 여름이 없는 혹독한 3번의 겨울인 핌불베트르(Fimbulvetr)를 맞는다.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 로키(최고 신 ‘오딘’의 의형제이자 참모)가 입을 벌리고, 땅과 하늘의 천장에 동시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늑대 펜릴, 너무 커서 자신의 몸으로 세계를 한 바퀴를 두르고도 꼬리를 물 수 있는 뱀 요르문간드 등이 속박에서 풀려난다. 펜릴과 요르문간드는 로키의 아들이다. 이들은 라그나로크가 시작되자 명계를 지키는 개 가름, 불의 나라 무스펠헤임의 거인 수르트 등과 세상을 휩쓸고 신과 전쟁을 벌인다.
최고 신 오딘은 펜릴에게 한 입에 삼켜져 패배하고, 펜릴은 오딘의 아들인 비다르에 의해 입이 찢기고 창이 심장에 박혀 죽는다. 요르문간드는 숙적이자 오딘의 아들 토르와 싸우다 ‘묠니르’(토르의 망치)에 머리를 맞아 죽는다. 하지만 토르는 요르문간드의 뱀독(蛇毒)에 중독돼 아홉 걸음을 뗀 후 쓰러진다. 로키는 숙적 헤임달과 겨루다 머리를 서로의 몸에 박는 기이한 자세로 동귀어진한다.
전쟁 후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불의 거인 수르트는 불의 검을 휘둘러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비롯한 세계를 불태워 멸망시킨 후 자신도 소멸한다. 세계 멸망 이후에는 세계수 등에 숨어 몸을 피한 남녀 한쌍과 목숨을 건진 일부 신, 부활한 신이 문명을 재건한다.
만화 라그나로크 1권 표지 / 구글 이미지
어째서 아기자기한 게임 제목에 종말 신화의 이름이 붙였을까. 사실 이 게임은 라그나로크 신화를 직접적인 모티프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이명진 만화가가 그린 소년 만화 ‘라그나로크’를 원작으로 한 게임이다. 당시에는 김진 작가의 ‘바람의나라’, 신일숙 작가의 ‘리니지’ 등 만화를 원작으로 게임을 만드는 일이 흔했다.
만화 라그나로크는 주인공 케이아스가 자신의 정체를 찾는 모험을 다룬 북유럽 신화 배경 만화다. 만화 내 등장인물 이름 등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것을 일부 차용했다. 이명진 작가는 라그나로크 온라인 개발에 직접 참여했고, 이후 만화가와 게임 개발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게임 개발에 집중한 탓에 라그나로크 원작 만화는 단행본 10권까지만 나오고 연재가 중단됐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에는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한 게임답게 궁그닐(오딘의 창 궁니르의 잘못, 묠니르와 마찬가지로 던져서 적을 찌르면 다시 손으로 돌아온다), 미스틸테인(오딘의 아들 발두르를 죽이는 데 사용된 겨우살이 나뭇가지) 등 신화 속 무기가 나온다. 모바일게임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튜토리얼 부분에서 비프로스트를 건너 발할라(북유럽신화의 천당)로 가는 장면을 담기도 했다.
인테리어 분야 최초 1000만 다운로드 기록. 한 달 방문자 수 740만명(앱·웹사이트 종합). 인테리어 플랫폼 서비스 ‘오늘의집’ 이야기다.
[게임체인저: 그들의 성공 키워드3]
① ‘오늘의집’ 이승재 대표
[게임체인저: 그들의 성공 키워드3] ‘오늘의집’ 이승재 대표
오늘의집은 온라인상에서 사용자가 자신의 집 사진을 올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가성비 좋은 인테리어 소품 구매와 함께 전문가 시공 의뢰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다. 2014년 인테리어 콘텐트 공유 서비스로 시작해 2016년부터는 가구 등 인테리어 용품을 함께 판매하는 ‘콘텐트 커머스’ 서비스로 진화했다. 지난 5년간 누적 거래액만 7000억원이 넘는다.
젊은 세대, 특히 1~2인 가구의 인테리어 고민을 풀어주는 서비스 ‘오늘의집’. 구글 플레이가 선정한 2018년을 빛낸 ‘올해의 베스트 앱’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집’을 만든 (주) 버킷플레이스 이승재 대표. 우상조 기자
이 놀라운 기록의 서비스를 만든 사람은 이승재 (주)버킷플레이스 대표다. 서울대 화학생물공학과 재학 시절, 카페 같은 멋진 공간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돈은 없고 혼자 해결하기엔 인테리어가 너무 힘들었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챙겼다고 했다. 그렇게 디자인을 공부한 적도 인테리어 분야에서 일한 적도 없는 26살의 공대생이 만든 인테리어 서비스가 ‘대박’이 났다.
이 대표가 말하는 핵심 성공 비결 3가지를 영상에 담았다. 한 가지만 먼저 공개하면 취업보다는 창업자의 길을 걷고 싶었던 그는 “누구나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것”에서 창업 아이템을 찾았다고 했다. 큰돈 들이지 않아도 사무실과 집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데 그 방법을 몰라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고 ‘누구나 쉽게 인테리어를 할 수 있는 서비스’의 가능성을 봤던 것. 인테리어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었던 ‘덕’도 톡톡히 봤다고 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공대생으로서 모든 인테리어 관련 정보 수집과 상품 거래를 ‘온라인’으로 집중시켰던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오늘의집을 출시하고 처음 2~3년간은 콘텐트에만 집중하다 보니 수익 모델이 없어 수입 제로. 이커머스를 시작했을 때는 1주일간 제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금의 7000억원 누적거래액 이커머스의 물꼬를 열어준 제품은 ‘액자’였다고 한다. 젊은 사용자들이 액자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된 이유는 뭘까. 이승재 대표의 3가지 성공 비결과 함께 영상에서 확인하시길.
기획·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영상=김지선·정수경 그래픽=이경은
노태권(가운데)씨는 게임 중독에 걸린 아들 동주(왼쪽)와 희주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같이 걷자”고 했다. 그는 “부모는 아이가 공부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되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하찮은 일에 빠지는 아이를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시행착오도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원이 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아이의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큰아들 동주가 중학교 3학년 어버이날 때 쓴 카드. /노태권씨 제공
‘어버이날
우리 아빠는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막노동꾼이다.
2006. 5. 8.’
노태권(64)씨는 중학교 3학년짜리 첫째 아들이 쓴 어버이날 카드를 발견하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멍하게 있을 정도로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저걸 보고 아들에게 화낼 생각도 못 했던 건 틀린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중학교 겨우 나온 막노동꾼인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멸치 똥 같은 아버지였죠. 멸치는 끓이면 감칠맛 성분이 우러나 요리의 맛을 높여주는 음식 재료이지만, 쓴맛만 내는 멸치 똥은 솥에 넣기 전에 떼버리잖아요.”
노씨의 최종 학력은 중졸(中卒)이고, 그는 40대 중반에야 한글을 뗐다. 두 아들도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첫째 동주(29)씨는 게임 중독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형처럼 게임에 빠졌던 둘째 희주(27)씨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다. 중졸 삼부자가 된 셈이다. 두 아들의 중졸이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 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노씨는 두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게임 중독이란 수렁에서 건져냈다. 동주씨는 2011년 서울대 경영대에, 희주씨는 2015년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두 사람 모두 4년 장학금을 받았다. 한글도 몰랐던 중졸의 아버지는 어떻게 두 아들을 서울대에 가도록 가르쳤을까? 최근 에세이집 ‘떼루 떼루 빠떼루 달인’을 펴낸 노씨와 두 아들을 함께 만났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의미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단다.
마흔 넘어서 아내에게 한글을 배우다
노씨 또래 중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 노씨는 예외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 시청 공무원이어서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두 남동생은 모두 연세대를 나왔을 정도로 집안에선 자식의 공부 뒷바라지를 잘해줬다. 난독증이 있는 노씨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글을 몰랐고, 교과 과목 공부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시험 성적으로 중학교 배치를 받던 시절에 그를 받아줄 학교는 없었다. 아버지는 친구가 교사로 있는 중학교에 그를 보냈다. 노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난독증이란 걸 알고 있었나요?
“옛날에 그런 게 뭐 있었나요, 요즘 사람도 난독증을 잘 모르는데. 글을 모르니까 어렸을 때부터 어디서든 바보 취급을 받았고, 아버지한테도 많이 맞았어요. 국민학교 때 집에 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걸 보고 무서워서 저수지로 뛰어든 적도 있었어요. 그날 아버지가 물에 뛰어들어 저를 꺼내주시면서 ‘괜찮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 후로 저를 때리거나 혼내지 않으셨어요. 중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에게 꽃을 받은 졸업생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가 저를 마중 나오곤 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학교도 못 가고 막노동을 하는 장남이 불쌍하고도 애틋했겠죠. 저는 아버지가 무서우면서도 죄송스러웠죠. 장남이 이러니까….”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은가요.
“글을 못 읽으면 어디 가나 갑질을 당해요. 똑같은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욕만 먹고 말 것을 전 주먹으로 맞았어요. 무시해도 되는 바보라고 생각하니까.”
―난독증을 고친 계기가 있습니까.
“아내 덕분입니다. 서른다섯 살에 은행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와 결혼했어요. 은행 지점장이던 아버지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는 당시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 한 대를 가진, 능력 있는 여자였죠. 결혼 후 막노동을 그만하고 아내가 모은 돈으로 공사장에 자재 납품하는 사업을 했는데, 꽤 잘됐습니다. 그러다 IMF가 오는 바람에 사업이 망했죠.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아파트와 패물을 다 팔았는데도 빚이 남았어요. 집에 찾아온 빚쟁이에게 아내가 1년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다니던 은행을 당장 그만두면 퇴직금이 얼마 안 나오지만, 1년 뒤 명예퇴직 신청을 하면 빚을 갚을 만한 퇴직금이 나온다고요. 덕분에 저는 신용 불량자 신세를 면했습니다. 다시 막노동을 하려는 저에게 아내가 글공부를 하자고 했습니다.”
노씨의 아내 최원숙(64)씨에게 “왜 글도 못 읽는 막노동꾼과 결혼했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첫눈에 나한테 반했다고 했어요. ‘나는 중졸에 막노동꾼입니다. 이런 나라도 좋다면 결혼하고 싶습니다’. 건장해서 남자답게 느껴지더라고요. 무엇보다 눈빛에서 억눌린 열정과 욕망이 보였어요. 내가 도와주면 그걸 발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현대판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다.
―고졸인 아내가 어떻게 난독증을 고쳤죠?
“저는 ‘홍’이란 글자를 보면 위아래에 ‘ㅎ’이 두 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아랍 문자를 보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으로 보이죠?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글자를 그냥 외웠어요.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만들 수 있는 글자가 총 1만1172자라던데, 그중에 ‘ ‘처럼 일상에서 실제로 쓰이지 않는 비(非)단어를 제외하면 약 1500자예요. 아내가 도서관 다니면서 1500자를 추려내서 종이 한 장에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적어주면 그걸 외웠어요. 외워도 계속 까먹는 통에 한글을 떼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노태권씨는 난독증을 극복했지만 여전히 보통 책의 활자를 보기 어렵다. 글씨가 두 배는 크고 진해야 한다. 아내가 수능 교재를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주면 남편은 그것을 갖고 다니면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했다. /노태권씨 제공
―생계는 어떻게 했나요.
“아내는 은행을 그만둔 다음 식당에서 일했고, 저는 막노동을 했습니다. 아내는 일 마치고 새벽 한 시에 집에 와서도 저를 앉혀놓고 공부를 시켰어요. 저는 길을 걸어 다니거나 일터의 점심때, 쉬는 시간에도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난 뒤에 아내가 이젠 다른 공부도 하자고 하더군요. ‘내 나이 마흔다섯이면 십, 이십 년 살다가 죽을 건데 공부해서 뭐하냐’고 하니까 아내가 ‘100세 시대가 온다, 아직 반도 안 살았다’고 했어요.”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초등학교 3~4학년 사회·과학 교과서로 시작했어요. 한글을 알아도 작은 글씨는 눈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아내가 교과서 내용을 요약해서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줍니다. 그 종이를 테이프로 이어 붙여서 갖고 다녔어요. 출퇴근 시간이나 일터에서 볼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든 거죠. 아내가 책을 읽어서 테이프에 녹음해준 것도 있어요. 가끔 아내가 졸다가 코 고는 소리도 들려요(웃음). 당시 막노동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갔고, 대부분 여관에서 자거나 노숙도 했죠. 그런 날엔 길에서 그냥 공부하는 겁니다.”
―공사장에서 공부할 분위기가 아녔을 텐데요.
“다들 저를 정신 나간 놈 취급했죠. 그 나이에 막노동하면서 공부를 해서 어디에 쓰겠느냐고 놀렸고, 점심때 공부하고 있으면 와서 책을 발로 차기도 했어요. 쉬는 시간에 공부하다가 잘린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영어 단어장을 보면서 짜장면 배달하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갔어요. 한 손에는 단어장, 다른 한 손에는 철가방을 꼭 쥐고 있었더래요. 공부는 해야 하는데, 돈도 벌어야겠고….”
―공부는 어디까지 했습니까.
“공부를 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고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수능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EBS 수능 교재도 다 옮겨 적어서 저만의 교재를 만들어줬어요. 아내가 쓴 글자 수를 대충 따져보니 3000만 자가 넘어요. 혼자서 공부하다가 저만의 공부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7년 정도 됐을 때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풀어봤는데, 매번 만점이 나왔습니다. 2013년 공중파 TV 프로그램에 ‘공부 달인’으로 소개됐을 때 제작진 앞에서 그해 수능을 풀었는데 한 개 틀렸습니다.”
―자신의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어떻게 아들의 공부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나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정말 잘했어요. 첫째가 중학교 가서도 전교 상위권을 유지한다고 하기에 저희 부부는 그런 줄로만 알았죠. 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에 갔고, 아내는 식당에서 낮 한 시부터 밤 한 시까지 일했으니 학교에도 못 가봤죠. 첫애가 중3이 됐을 때 아내가 전화 와서 ‘동주가 전교 꼴찌에 가까운 성적표를 전교 3등으로 고쳤다가 걸려서 집을 나갔다’고 했어요. 성적 위조를 한 게 처음이 아니었대요. 그때 뭔가 잘못됐단 걸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죠. 애들이 공부를 포기한 지는 오래였고, 몇 날 며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노릇 못하면 친구라도 되자”
동주·희주 형제는 사이가 좋았다. 부모는 집을 비우고,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니 둘이 함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춘천에 살던 형제는 함께 가출을 자주 했다. 막노동하는 아버지와 식당일 하는 어머니가 있는 집이 싫었고, 어디 가서 게임이나 실컷 하고 싶었단다. 2007년 12월 자전거를 팔아 돈을 마련해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부산에 가는 데 돈을 다 써버린 형제는 가방에 들어 있는 20만원을 발견했다. 가출하는 아들 둘이 고생할까 봐 노씨가 미리 넣어둔 돈이었다. 동주씨는 “당시 다리를 다친 아버지가 공사장에 이틀 나가서 벌어온 돈이었다”며 “그날 바로 집에 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후 다시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아들이 가출할 줄을 어떻게 알았나요?
“이미 (가출을) 몇 번 했기 때문에 나갈 때가 되면 분위기가 느껴져요. 그럴 때면 못 나가게 하려고 운동화랑 옷을 빨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공사장에서 돈을 벌어서 가방에 넣어뒀죠. 혹시 길에서 자거나 밥을 못 먹을까 봐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별 볼일 없는 막노동꾼’이라고 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때 ‘아무리 돈·직업·학벌이 중요한 세상이라지만, 명문대 나오고, 부자이며, 잘나가야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 건가’라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돈과 능력이 중요한 게 현실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친구라도 돼주기로 했어요. 제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애들이 차마 그러진 못하고 저를 가끔 ‘벽공’(碧空·푸른 하늘)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게임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학교 다녀오면 집에 부모는 없지, 친구들은 다 학원 가지. 돈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아이들이 결국 할 게 게임밖에 없더라고요. ‘이건 애들 잘못이 아니다, 다 아버지 노릇 못 한 내 잘못이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하고 돌아와서 졸릴 땐 아내의 교재를 벽에 붙여놓고 서서 공부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기도 한다. /노태권씨 제공
아이들과 걸었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
―게임 중독을 어떻게 고쳤나요.
“첫째가 중학교 졸업 전 한 학기를 남겨두고 학교에 안 가려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공부도 안 하니까 의미가 없는 거죠. 초등학교 졸업이 아이의 최종 학력이 될까 봐 불안했습니다. 제가 ‘주말에 나와 산책을 하면 게임 그만하라는 얘기 안 하겠다’고 빌다시피 얘기해서 애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여덟 시간 동안 소양강을 따라 25㎞를 걸으면서 제 나름대로 춘천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해줬는데,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한테 눈길 한번 안 주더군요. 그래도 몇 달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 도중 큰애가 ‘아빠, 밥 안 먹어?’라고 한마디 던지는데 눈물이 났어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걷는 게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게임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공부를 하기 위한 체력까지 미리 기를 수 있었다. 동주·희주씨는 “걷는 시간 빼고는 다 게임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덟 시간씩 걷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게임을 오래 못 했다. 그렇게 게임하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노씨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하던 동주씨를 자신의 일터에 데리고 다녔다. 부자(父子)는 전국을 돌면서 공사장·주유소·세차장 등에서 일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희주씨도 합류했다. 노씨는 “다행히 동주의 체력이 좋아서 몸 쓰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대신 나는 어린 아들을 학교에도 안 보내고 돈벌이시킨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일년 반 동안 전국 8000㎞를 돌아다니고 나서, 동주씨는 아버지에게 “공부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를 해보니까 중학교만 나와 갖고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게 아예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다. 공부를 해봤자 당장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상황을 바꾸려면 일단 공부를 해야 했다”고 했다. 2008년 8월, 또래 친구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아들과 전국 공사장과 주유소를 돌아
―아이를 데리고 다닌 이유가 무엇인가요.
“게임 중독에 빠진 아들을 보면서 좋은 아버지가 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동시에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아들한테 ‘아빠는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같이 다니자고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마치고 일을 시작한 아버지의 과거를 아들이 되풀이했네요.
“아이를 데리고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었어요. 한국 사회는 아이들에게도 실패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만 나온 애는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 안 간 애, 문제가 있는 애라고 낙인찍고 함부로 대합니다. 제 아이들은 게임을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아파서 학교를 포기했을 뿐이에요. 학교를 포기했다고 인생까지 포기하게 놔둘 순 없잖아요.”
―아이들은 게임을 끊었나요.
“아니요. 저는 아이들이 게임을 아예 못 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첫째는 저랑 일을 하러 다니면서도 PC방에 가서 한두 시간씩 게임을 했어요. 일이 힘들어지니까 그것도 잘 안 하더라고요. 나중에 공부할 때도 게임을 조금씩은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공부와 담을 쌓은 아들을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겠네요.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어요. 걸핏하면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좀 조용하다 싶으면 졸고 있고. 일단 5분 동안만 집중하는 공부법으로 시작했어요. 컴퓨터 자판을 잘 치는 애니까 5분 동안 영어 단어를 자판으로 치게 했고, 10분 휴식 시간과 게임 시간도 줬어요. 이걸 반복해서 적응시킨 다음에 공부 시간을 5분에서 10분, 20분으로 늘리다 보니 나중에는 100분도 거뜬히 집중하던데요.”
―명강사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고 합니다. 모의고사를 만점 맞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이 꽤 답답한 학생이었을 텐데요.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은 모습부터가 어찌나 귀엽던지. 공무원이었던 저희 아버지에 비하면 저는 덜떨어진 아버지인 데다가, 공부도 0점부터 시작해서 100점까지 해봤습니다. 공부 못하는 심정은 제가 제일 잘 알죠. 저는 마흔 넘어서 공부 시작했는데, 아들은 열일곱 살에 시작했으니 시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목표는 애를 서울대 보내는 게 아니라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좀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하루는 자습을 시키고 일을 다녀왔더니 아이가 책을 다 찢어놓고 밖에 나갔어요. 아내한테 들어보니, 아버지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불안하고 답답해서 소양강에 다녀왔대요. 그런 모습을 보고 저는 더 천천히 가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왼쪽부터 첫째 아들 동주, 어머니 최원숙, 아버지 노태권, 둘째 아들 희주.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사교육은 전혀 없었나요.
“아내는 차비를 아끼려고 밤늦게 일 끝나고 집까지 걸어왔는데, 사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일하는 시간을 좀 줄이고 7년 동안 공부한 비결과 시험 보는 요령을 모두 전수했어요. 수능 전 과목을 직접 가르쳤어요. 동주는 두 달 만에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이듬해 수능을 본 뒤 연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지 1년 7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에요. 실력보다 점수가 덜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재수를 하겠다고 해서 아예 학교 등록을 안 했어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1년 뒤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어요.”
―둘째 희주는 또래에 비해 대학을 더 늦게 들어갔습니다.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학교를 못 나가는 날이 더 많았고, 결국 고1 때 자퇴를 했어요. 형이 대학 가는 걸 보고 자기도 공부를 하겠다는데 몸이 계속 아팠어요. 나중에 대상포진까지 걸려 눈도 못 뜰 지경이 돼서 책을 못 보길래 제가 EBS 교재를 옆에서 읽어주면서 강의를 했어요. 수능 열두 과목을 그렇게 가르치다가 저도 몇 번 쓰러졌어요.”
희주씨는 2013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아토피 때문에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그는 학교를 관두고 서울대 간호학과를 목표로 다시 수능을 봐서 2015년 합격했다. 현재 동주씨는 로스쿨 준비를 하고 있고, 희주씨는 4학년에 재학 중이다. 형제는 아버지가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고 ▲간섭을 거의 안 했으며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게임 중독을 끊어내고 대학 입시를 성공시켰다고 봤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자식이 움직이질 않는 것 같아요. 부모도 매력을 드러내야 아이들이 따르고 싶어 하고, 부모가 움직여야 아이들이 뒤따라가지 않을까요. 저희는 아버지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하고 아버지가 향하는 곳으로 방향을 튼 경우죠.”(동주)
부모가 매력이 있어야 아이가 따른다
―요즘 ‘아빠 찬스’란 말이 있습니다. 주로 ‘잘나가는 아빠’의 덕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제가 아버지 노릇을 못 해서 애들이 힘들어졌고, 나중에 조금이나마 제 노릇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제가 게임 중독 걸린 애 둘을 직접 가르쳐서 서울대에 보냈단 얘기가 나오니까 서울에서 큰돈 갖고 와서 자기 애도 가르쳐달란 부모가 꽤 있었어요. 아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애 공부시키는 부모도 세상에 많다. 우리가 그걸 잘 알면서 어떻게 이 돈 받고 애들을 가르치느냐’고 다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아내가 참 고마웠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애들한텐 ‘아빠 찬스’가 없었지만, 저에게 ‘아내 찬스’가 있었네요.”
―학력은 여전히 중졸입니다.
“원래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었고, 공부가 재밌어서 계속 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만점을 받으니까 나중에는 해외 유학도 가볼까 하는 큰 꿈까지 꿨어요. 그때쯤 애들의 문제를 알고 거기에만 매달리느라 제 공부를 못 했죠. 애당초 제 목표가 제가 대학에 가는 것이거나 애들 서울대 보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쯤 많이 허탈할 거예요. 100세 시대를 살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니까, 그걸 이제 써먹어야죠.”
노씨의 다음 목표는 창업이다. 개발자·기획자 세 명과 함께 7월에 법인을 설립하고 50대 이상을 위한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플랫폼 ‘펼치고’를 선보일 계획이다. 노씨의 사업 계획이 적혀 있는 서류의 글씨가 책상 맞은편에서 보일 정도로 컸다. 남들은 한글 폰트 10~12포인트 크기로 볼 수 있는 글자를 그는 18~20포인트로 키우고 ‘굵게’까지 만들어야 볼 수 있다. 정자(正字)로 쓰지 않은 글씨도 여전히 못 읽는다. 그는 “난독증은 완전히 고쳐지는 게 아니다. 나는 아직 좀 모자란 사람이다”라고 했다.
“집도 절도 없는, 돈이 없어서 학원도 보내주지 못했던 막노동꾼 아버지이지만,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모든 것을 잘하는 완벽한 아버지는 없을 것이고, 아버지라고 해서 전부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처럼 모자란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일본 정부와 민간이 관민(官民)일체로 1조엔(약 11조4000억원)을 쏟아부은 여객기 국산화 사업 ‘스페이스제트’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미쓰비시항공기는 지난 15일 개발 인력과 조직을 대폭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전체 직원 2000명의 절반인 1000명을 감원한다. 사장은 지난 2월 사임했는데 지난 5년간 3번째 교체다. 해외 사무소도 대부분 폐쇄키로 했다.
스페이스제트는 2000년대 중반 일본의 산업통상자원부 격인 경제산업성 주도로 시작된 국가 프로젝트였다. 일본의 산업 역량을 결집해 90석 규모의 소형 여객기를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로 2008년 공식 출범했다. 원래 개발비는 1500억엔, 납품 예정일은 2013년이었다. 그러나 개발비는 당초의 7배인 1조엔까지 늘었고, 납품일도 6번이나 연기를 반복해 계획보다 9년 늦어진 2022년으로 미뤄졌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터졌다. 적자 누적에 제품을 사줄 시장마저 사라지면서, 사업 자체가 공중분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무너지는 일본 항공 산업 국산화
일본의 항공기 산업에 대한 꿈은 남달랐다. 2차 대전 초기에 미쓰비시중공업이 만든 제로 전투기가 당시 미국 전투기를 성능으로 압도했을 만큼, 항공기 개발의 역사도 길다. 그러나 패전 후 미 군정이 7년간 항공기 생산·개발을 금지하면서 타격을 입었고 산업 기반도 무너졌다.
2008년 출범한 스페이스제트 사업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업이었다. 정부가 개발비의 3분의 1인 500억엔을 대고 미쓰비시중공업이 자회사인 미쓰비시항공기를 설립해 사업을 주도키로 했다. 주요 출자자는 미쓰비시중공업, 도요타자동차, 스미토모상사, 미쓰이물산,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으로 관민일체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초 2013년 납품할 예정이었지만 5차례 연기 끝에 올해로 미뤄졌고, 다시 지난 2월 2022년까지 연기한다는 6번째 발표가 나왔다.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적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미쓰비시항공기의 모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올해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스페이스제트 사업의 적자는 2018년 852억엔에서 작년 2633억엔까지 확대됐다. 올해는 인력·비용을 대폭 줄여 적자 폭을 줄인다는 계획이지만 그래도 1300억엔 적자를 예상하고 있다. 최근 3년간의 적자만 4785억엔(약 5조4000억원)에 달한다. 스페이스제트의 실적 부진 때문에 미쓰비시중공업도 작년에 20년 만에 처음 적자를 기록했다.
사업 채산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그동안 꽤 있었다. 민항기 시장은 장거리 국제노선을 중심으로 하는 중·대형기(130석 이상)와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다니는 소형기(130석 미만)로 나뉘는데, 스페이스제트는 소형기 중에서도 좌석이 100석 이하인 ‘리저널 제트기’에 속한다. 리저널제트기 시장은 전체 민항기 시장의 5%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작은 여객기로 시작해 전체 항공기 산업을 키워나가겠다며 신규 시장 진입을 시도했다.
게다가 리저널 제트기 시장의 80%를 장악한 캐나다 봄바디어와 브라질 엠브라에르를 각각 에어버스와 보잉이 인수하면서, 시장에 철옹성이 구축됐다. 중국까지 리저널 제트기와 중형 여객기를 개발해 자국 중심으로 보급에 나서면서, 스페이스제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반도체·LCD 연합에 이어 세 번째 실패로 끝나나
일본 정부 주도로 만든 기업 연합을 뜻하는 히노마루(日の丸) 연합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세 번의 실패가 있었다. 일본은 1999년 NEC·히타치제작소의 D램 사업을 통합해 엘피다메모리를 창립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해가던 한국을 타도하고, 1980~1990년대 반도체 산업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전기의 D램 사업까지 흡수해 덩치를 더 키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일본 정부는 2009년 엘피다에 공적 자금 300억엔을 투입하며 지원에 나섰으나 결국 엘피다는 2012년 파산을 신청했고 2013년 미국 마이크론에 흡수돼 사라졌다.
엘피다가 파산한 2012년엔 소니·도시바·히타치의 LCD 사업부를 통합해 재팬디스플레이(JDI)를 만들었다.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밀리자, 정부 주도로 각 기업의 LCD 사업을 모아 승부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수천억엔을 신규 투자했는데도 한국을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애플과의 납품 계약까지 잘못되면서 적자가 산더미처럼 커졌다. 경영난 끝에 JDI는 LCD 사업을 대폭 축소했고, 올 들어 주력 공장까지 매각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영광 재현하려던 아베의 꿈 무산
스페이스제트 사업은 일본인에게 1964년 도쿄올림픽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은 1962년 전후 최초의 국산 프로펠러 여객기 ‘YS-11’의 첫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에도 관민출자회사인 ‘일본항공기제조’가 개발을 맡았다. YS-11은 1964년 도쿄올림픽의 성화 봉송에 사용됐는데, 1964년 운행을 시작한 세계 최초의 고속철 신칸센(新幹線)과 더불어 일본 국민에게 전후 부흥의 상징이었다. YS-11은 이후 제트여객기에 밀려 1973년 생산이 중단됐고, 2006년 운항 중단됐다.
스페이스제트는 아무리 늦어도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올해 전에 납품 완료될 예정이었다. 올림픽이 예정대로 개최됐더라면 1964년에 이어 또 한 번 자국산 여객기가 성화 봉송에 사용될 수도 있었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생으로 도쿄올림픽을 경험했던 기억을 최고로 꼽는 아베 일본 총리가 또 한 번 일본 부흥의 영광을 세계에 알리는 데 최적의 소재가 될 터였다.
그러나 면밀한 분석이 결여된 채 시작된 이 정부 주도 프로젝트는 소중한 세금과 기업 자원만 낭비된 채 재앙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세금을 써서 경쟁력 떨어지는 기업을 통합시킨들, 민간의 리더십이 안받쳐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2017년 미쓰비시중공업의 미야나가 슌이치 사장(현 회장)은 이렇게 후회했다. “개발에 들어가기 전에 정보 수집과 위험 분석에 대해 좀 더 공부했어야 했다.”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 연합
태양을 본뜬 붉은 동그라미라는 뜻으로, 일본 국기인 일장기(日章旗·일본어로 닛쇼키)의 별칭. 히(日)는 태양, 마루(丸)는 둥근 모습을 뜻한다. 일본인들은 국가적인 것을 강조할 때 히노마루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일본이 외국에 맞서 정부 주도로 만든 기업연합을 히노마루연합이라고 부른다.
1604년 얀 산레담이 그린 ‘동굴의 우화’. 플라톤은 동굴에 갇힌 사람은 동굴 밖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희미한 빛줄기를 좇아 참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인뿐이다. 어두운 동굴은 현실이며 빛나는 바깥세상은 이데아다. [사진 위키피디아]
75년 전 플라톤이 철학의 법정 앞에 섰습니다. 엘리트 선민의식으로 전체주의의 원형을 만들어냈다는 이유였죠. 그를 고발한 이는 ‘비판적 합리주의’ 철학자 칼 포퍼였습니다. 1945년 그가 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지금도 자유세계를 대표하는 고전으로 읽힙니다. 포퍼는 “우리가 문명사회의 인간으로 남길 원한다면 단 하나의 길, 열린사회의 길만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은 포용사회 강조하지만
“포퍼는 닫힌사회라 했을 것”
“민주당에는 민주주의자 없어”
정의 ‘독점’ 로베스피에르 비극
포퍼가 플라톤을 비판한 이유는 닫힌사회의 원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포퍼 연구의 권위자인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는 “플라톤이 완성한 전체주의·유토피아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구축된 허구적 사상인지 폭로했다”고 말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필연적 법칙과 운명의 틀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워 이성과 자유를 부정” 했기 때문이죠.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그린 설계도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소수의 엘리트와 이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난 것이었죠.
2000년 넘게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군림한 플라톤은 어쩌다 이런 오명을 얻었을까요? 부유한 귀족가문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이름의 뜻(plato·넓은)처럼 딱 벌어진 어깨의 거구였습니다. 한때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으나 집안의 전통대로 정치에 발을 담갔죠. 하지만 이내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껴 학문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때 만난 스승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의 핵심 철학은 ‘지적 겸손’입니다. 어떤 현자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철인정치는 전체주의의 원형
인간혁명_소크라테스의죽음
하지만 플라톤은 정반대였죠. 이한구 교수는 “스승의 죽음이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합니다. “무지한 우중이 현자를 죽였다고 생각해 선민의식을 가진 엘리트 정치를 꿈꾸게 된 것”이죠.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적 정치체제로 ‘철인왕’을 꼽았습니다. 지혜로운 엘리트가 지배하는 유토피아입니다. 그의 역사법칙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국가는 부유한 문벌이 지배하는 과두정과 방종이 판치는 민주정을 거쳐 마지막 단계인 참주정으로 퇴보합니다.
대신 플라톤은 통치계급인 수호자(guardian), 국방·치안 등을 담당하는 전사·군인, 생산을 담당하는 시민 등 3계급으로 나뉜 이상국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수호자는 지혜로운 철인입니다. 국가의 목적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데, 참된 정의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고 이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인뿐이기 때문이죠.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은 ‘역사법칙주의’의 맹신자였습니다. 역사엔 특수한 법칙이 존재하며, 이를 발견한 철인은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이때 법칙에 어긋나는 다른 생각은 배척되고 적폐로 여겨집니다.
선택된 소수의 독선
칼 포퍼
포퍼는 선택된 소수만이 역사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이데아(진리)란 미명 아래 현실을 유토피아로 바꾸려는 것이 독선이라고 생각했죠. 세상은 일순간의 혁명이 아니라, 상대적인 단점들을 하나씩 보완해 나가는 ‘점진적 사회공학’의 방식으로 개선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선 주류 이념 또한 언제든 다른 의견으로 반박될 수 있는 열린사회여야 합니다. 반대로 닫힌사회는 반증 가능성이 없는 원시적 신화와 종교적 믿음에 가깝습니다.
닫힌사회는 개성과 다양성을 말살하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권력자는 급진적 탐미주의에 빠지기 쉬운데, 이는 곧 폭력으로 전이됩니다. 포퍼는 “상대적으로 나은 세계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추함이 전혀 없고 완전히 아름다운 세계를 꿈꾼다”며 “탐미적 열광은 병적 흥분 상태로 발전하기 쉬우며 이상 실현을 명목으로 폭력을 긍정하고 급기야는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치와 마르크시즘
히틀러 프랑코
대표적인 게 나치즘과 마르크시즘이죠. 플라톤의 철인은 나치즘에선 우성인자를 가진 아리아인으로, 마르크시즘에선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대체됩니다. 이들 모두 자신과 다른 집단을 배격하며, 피아 구분이 명확한 닫힌사회의 추종자들입니다. 세상을 설계도처럼 만드는 과정에서 대중은 언제든 대의를 위해 희생될 수 있는 하나의 부품일 뿐이고요.
만일 포퍼가 한국 사회를 본다면 어떤 진단을 내릴까요. 이한구 교수는 “포퍼는 아마도 닫힌사회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문재인 대통령은 포용사회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그와 배치되는 일들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다른 생각을 거부하는 여권의 행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2월 ‘민주당만 빼고’라는 칼럼을 썼다 고발당한 임미리 교수, 당론을 거부하고 소신 투표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된 금태섭 전 의원처럼 다양성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친여 성향의 네티즌들이 비판적인 글을 쓴 기자나 교수에게 ‘댓글 테러’와 ‘신상 털기’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지식인의 입에 물려진 재갈
그 결과 지식인의 입에는 재갈이 물립니다. 서울대 교수 A씨는 “정권에 할 말은 많지만 이미 ‘적폐’로 몰려 많은 공격을 받고 있어 말하기 조심스럽다”고 합니다. 경희대 교수 B씨도 “괜히 찍히면 골치 아프다, 댓글 테러와 신상 털기가 두렵다”고 토로합니다. ‘문빠는 미쳤다’ 등의 칼럼으로 곤욕을 치른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멘탈이 약한 교수들은 (댓글 테러 등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당은 “생각 같아서는 언론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30배, 300배 때리고 싶다”(정청래)며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아울러 대북 전단까지 금지하는 법안을 내고, 통일부는 아예 전단 배포 단체를 고발했죠. 최근에는 토지거래허가제 실시와 외고·자사고 폐지 등으로 사유재산 및 학교선택의 자유까지 침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토록 강조해온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조그만 비판도 용납 안 해
닫힌사회는 권력자에 대한 조그만 지적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의전 대통령’ 발언으로 여권의 뭇매를 맞고 있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에겐 쥐박이, 2메가, 귀태, 그년 같은 표현을 해놓고 지금은 작은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며 “어느새 문 대통령은 권위주의의 상징이 돼버렸다”고 말합니다.
비판이 사라진 곳엔 권력을 향한 찬가만 남았죠. “달빛 소나타가 대통령의 성정을 닮았다”며 ‘월광’을 피아노로 연주했던 낙선 의원은 청와대에 입성했습니다. 한 검사는 유명 소프라노가 부른 ‘달님에게 보내는 노래’를 대통령에게 바치는 것인 양 SNS에 올려 큰 호응을 얻었고요. 열린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개인숭배와 우상화의 모습입니다.
모든 권력은 달콤함에 취해 쓴소리를 배척합니다. 과거 군사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 것도,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도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촛불시위 덕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라면, 적어도 그들이 적폐라고 지목했던 권위주의 세력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민주당에 민주주의자 없다”
프랑스 대혁명 후 혁명정부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로 끌려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진보 진영의 원로들조차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민주당엔 민주주의자가 없고”(홍세화) “도덕·정신적으로 파탄 나 전체주의와 비슷”하며(최장집), “자신의 선한 의지를 확신해 문제가 생기면 상대에게 책임을 씌우고 적폐로 몰아간다”(한상진)는 것이죠.
모든 혁명은 선의로 시작되지만, 정의를 독점하는 태도가 악을 낳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서민을 위한 변호사’로 존경받던 로베스피에르가 그랬죠. 그는 자코뱅당을 이끌며 정적들을 모두 단두대에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인권을 억압하는 자를 응징하는 게 자비이며 이들을 용서하는 건 야만”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 또한 몇 년 후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됩니다.
유토피아와 전체주의는 한 끗 차이입니다. 닫힌사회로 치닫는 지금, 한 유령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전체주의라는 유령이.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등장인물·이론
칼 포퍼
칼 포퍼
(1902-1994). 평생을 전체주의와 싸워온 자유세계의 대표 철학자. 과학과 과학 아닌 것의 구분을 ‘반증 가능성’에서 찾았다. 반박될 수 없는 이론은 종교적 믿음일 뿐이다. 진리를 강조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플라톤주의를 비판했다.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1516년 토머스 모어(사진)가 쓴 소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에서 시작된 이상 국가의 모습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계획 자체는 선한 의도를 띠지만,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갈등과 폭력이 수반된다.
마르크스
역사법칙주의
노예제와 봉건국가, 자본주의를 거쳐 마지막엔 공산사회에 이른다는 마르크스(사진)의 주장처럼 역사 발전엔 법칙이 있고, 이를 깨달으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입장. 포퍼는 플라톤, 헤겔 등을 대표적인 역사법칙주의자로 비판했다.
열린사회
열린사회·닫힌사회
닫힌사회는 정해진 역사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소수가 진리를 독점하고 반대 의견이 용납되지 않는다. 열린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역사는 급진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개선을 통해 발전된다.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가치다.
마음이 답답하고 스트레스가 몰려올 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넘어가지만 괜찮아지지 않는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나쁜 일이 벌어지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억’을 계속해서 마음 속에 호출하며 그 당시의 끔찍함을 생생하게 재경험 하곤 한다. 이를 ‘곱씹기’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단 한 번 일어난 일로도 영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 수치스러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잘 때마다 발차기를 하거나 오래 전에 열받았던 일을 다시 떠올리며 씩씩 거리고 얼마전 일어난 실패를 떠올리며 계속해서 자신은 ‘쓰레기’라고 되뇌이는 것이 좋은 예다. 특히 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여러번 수 년 동안 곱씹기를 하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받으며 마음을 멍들이곤 한다.
좋은 일만 떠올리면 좋을텐데, 좋았던 일보다 나쁜 일을 계속해서 다시 재생하고 재경험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존재 가능한 문제를 해결하고 생존 능력을 쌓기 위함이다. 화, 두려움, 슬픔, 부끄러움 등의 부정적인 정서는 생존에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들이다. 각각 내게 해롭기 때문에 물리쳐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정보(화), 살려면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알람(두려움),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경고(슬픔), 나의 사회적 평판과 자존감에 큰 타격이 생겼다는 경고(부끄러움) 등을 보낸다. 생존에 중요한 신호들인만큼 우리 마음은 긍정적인 정서보다 이들 부정적인 정서들을 더 크게 경험하고 오래 저장한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게 그렇게 화가 날/ 두려울/ 슬플/ 부끄러울 일인가?’라며 감정을 재해석 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해소하지 않으면, 이들 감정은 끄지 않은 알람처럼 계속해서 다시 울리며 언제든 머릿속을 지배하곤 한다. 쓸모 있는 알람이지만 좀 집요하고 아무 때나 울린다는 단점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원치 않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지속되면 우울증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특히 충격적인 사건이나 큰 스트레스가 발생했을 때 이를 무시하지 말고 감정을 잘 해소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해소하는 데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감정을 조각조각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진짜 원인을 찾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열이 나고 가슴이 뛰게 만드는 약물을 주고 옆에 무신경한 사람을 하나 세워둔다. 그러면 사람들은 약물에 의해 흥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단점과 잘못을 읊어댄다. 이는 독특한 상황이지만 실제로 일상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원인을 잘못 짚곤 한다. 그러다가 엉뚱한 해결책에 빠지고 진짜 문제는 해소하지 못한채 계속 고통받곤 한다. 따라서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고 내 감정이 어려울 때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표현하는 글쓰기(expressive writing)이다.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와 동료들은 오랜 연구를 통해 내가 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분석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행위가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소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며 실제 문제 해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페니베이커에 의하면 표현하는 글쓰기를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사건에 주목하기
오늘 날씨가 어땠고 오늘 무슨무슨 일을 했다는 정보들나 사실관계에 대해 집중하기보다, 또 객관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집중하기보다 나에게 의미가 있으며 내게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킨 사건에 집중하자. 다른 사람들이 뭐 그런 일을 가지고 그러냐고 얘기할 것만 같은 사소한 일도 괜찮다. 그 사건 자체의 디테일보다도 그 일을 통해 내가 어떤 다양한 감정을 느꼈는지, 그 감정을 느꼈을 때의 경험이 어떠했는지, 그 때는 무슨 생각을 했고 지금은 무슨 생각이 드는지에 집중하자.
②형식에 얽매이지 않기
이 때 중요한 팁은 맞춤법, 문법, 멋진 말 쓰기 같은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목적은 글에다 내 감정이 잘 보이게 자세히 그려내는 데 있다. 감정과 관련된 경험들을 뱉어내는 과정에서 내가 나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른 사소한 것들은 신경쓰지 말고 나의 느낌과 생각을 풀어내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이자.
③오직 나를 위한 나만 보는 글을 쓸 것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쓸 때 무의식적으로 가상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다. 누군가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연히 제 3자를 신경쓰며 자기 검열을 하곤 한다. 이런 얘기를 사람들이 보면 큰일난다든가 이런 표현은 옳지 않다는 둥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쓴다. 여기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 보기 위한 글을 써보자. 나만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 없다. 이런 감정과 생각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나중으로 미루고 나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자. 감정은 내 마음이 나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특정 메시지를 감지한 것이 내 잘못인 것도 아니다.
④머릿속을 정리해보기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는 글을 쓰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감정이 이해되고 해소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자세히 생각하다보면 왜 그랬는지가 보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해결책이 보이거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더라도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면 좋을지 떠오르곤 한다. 또는 단순히 문제를 확실히 깨달은 것만으로도 막연하게 느껴졌던 불안이 손에 잡힐 듯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여러번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학자들은 한 문제에 대해 하루 20분씩 4일 정도 이어서 글을 쓰는 것을 권장한다.
감정은 메시지다. 내가 내 마음이 보내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순간, 즉 감정이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하게 된 순간 더 이상 불필요한 알람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표현하는 글쓰기가 알람을 끄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참고자료
Pennebaker, J. W. (2004). Writing to heal: A guided journal for recovering from trauma and emotional upheaval. New Harbinger Publisher.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게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과 겸손, 마음 챙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