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응답 중인 조 후보자(왼쪽)와 금태섭 의원.
“민주당은 미쳤습니다.”
지난 12일 진정권 전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제목입니다. 이날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죠. 그는 “기어이 금태섭의 목을 쳤다, 친문 팬덤 정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막대기에 ‘조국수호’라고 써서 내보내도 공천 받았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온리버티’는 21세기 한국 사회를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 의원의 공천 탈락 사실을 놓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한 진 전 교수의 말을 깊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리버티’는 지난해 ‘조국 사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억압돼 왔는지 ‘반지성주의’의 관점으로 3회에 걸쳐 심도 있게 따져봅니다.
왜 21세기 ‘온리버티’인가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on liberty)』은 J.S. 밀이 1859년 출간한 자유주의의 교과서입니다. 철학에서의 ‘자유의지’와 달리 ‘사회적 자유’란 무엇이며,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깊은 통찰력으로 논했습니다. 밀은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역사를 발전시키는지 체계적으로 논증한 최초의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온리버티’는 새 시대에 걸맞은 21세기의 ‘on liberty’라는 뜻과 ‘only liberty’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only liberty’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처럼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의 모든 권리와 가치를 하나씩 제거해 나갈 때 최후에 남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 뿐(only liberty)이라는 이야기죠.
‘온리버티’는 인간 이성의 마지막 보루인 자유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합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끝나고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날카로운 현실 비판과 인문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이성을 마비시킨 매카시즘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던 서울 광화문 집회 모습. [중앙포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가 처음 정의한 개념입니다. 이성과 합리가 무시되고, 지성과 지성인을 배척하는 현상을 뜻하죠. 호프스태터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친 미국 사회를 해부하며 포퓰리즘과 결합한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민주적 가치를 무너뜨리는지 분석했습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선 제일 먼저 광기와 폭력이 자유주의의 싹부터 자릅니다. 선동가는 대중의 반지성을 등에 업고 비판적 지식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죠. 사고 회로가 마비된 대중은 선동가를 신격화 하며 정치는 종교로, 시민은 신민으로 전락합니다. 국가와 국민 사이에는 자연법상이 권리를 위탁한 사회계약이 아니라, 신과 그의 뜻을 대리하는 사제를 향한 맹목적 믿음 ‘신약(covenant)’이 존재할 뿐입니다.
‘온리버티’는 2019년 ‘조국 사태’가 남긴 반지성주의의 상처를 해부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는 헤겔(『법철학』)의 말처럼 실체적 진실은 일련의 사건이 모두 완료된 뒤에야 천천히 드러납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조차 이슈의 한 가운데에선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해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세상을 탐색했죠. 한국 사회를 둘로 쪼개놓은 ‘조국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자유주의의 눈으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던 서울 서초동 집회 모습. [연합뉴스]
이식된 민주주의와 시민의 부재
스스로 ‘민주주의’ 개념을 발명하고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시켜온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의 민주주의는 갑작스럽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민주주의의 개념과 원리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죠. 19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은 300여개에 달했고 1946년엔 400여개로 증가했습니다. 그 후에도 정당 간 이합집산과 반복적인 당명 바꾸기가 지속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당정치는 19세기 산업화의 산물입니다.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자가 다양한 사회 갈등과 균열을 대리해 조정하고 해결하는 정치체제입니다. 서구사회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중요한 사회 이슈는 대부분 정당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죠.
결국 정당은 다양한 시민의 의사가 대표되는 창구이며, 그런 고민이 모여 하나의 이념을 이루고 이를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은 시작부터 본질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념·정책에 따라 정당이 차별화 된 것이 아니고 명망가 위주로 판이 짜였기 때문이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당이 오직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고 시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대의 기능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사유화된 정당과 정치세력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대회의실에서 김영삼 민주ㆍ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동석한 가운데 민주자유당의 탄생을 선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승만의 자유당부터 박정희(민주공화당), 전두환(민주정의당) 등 독재정권은 모두 정당을 사유화 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처럼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이합 집산된 정당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회창의 신한국당,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역시 비슷한 이념과 정책 성향을 가진 이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오로지 권력 획득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뭉친 이익집단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정당은 이념과 정책보다는 인물 중심이었고, 그 결과 정당 지도자가 권력을 잃으면 조직도 약해졌습니다. 정당은 이념 정체성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의 팬덤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정당이 내놓는 정책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의 말 한 마디가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인 것이죠. 민주주의의 운영 주체인 시민의 역량과 성숙도가 낮을수록 정치가의 선전과 선동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미성숙한 시민과 이를 권력 획득·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정치가의 선동이 맞물렸을 때 반지성주의는 쉽게 싹을 틔웁니다.
21세기에도 여전한 386의 운동정치
80년대 전대협 활동 당시의 이인영 의원. 전대협 1기 의장을 지낸 그는 대표적인 ‘운동권’이자 ‘586’ 정치인이다. [중앙포토]
반지성주의를 주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 정치인들입니다. 현재의 집권세력인 그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와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화가 끝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은 ‘독재 타도’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분법이 어느 정도 효과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선악의 이분법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후퇴시킬 뿐입니다. 다양성과 개방성, 관용과 존중 등을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피아 구분이 명확한 운동권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좌초시킵니다. 소재만 다를 뿐 상대 정파를 ‘빨갱이’로 낙인찍어 권력을 유지했던 반공주의와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이처럼 메시지의 내용과 상관없이 메신저에게 낙인이 찍히면 합리적인 토론이 마비되고 이성적인 공론장이 붕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정책적 차이에 따라 구별되기보다는 그저 투쟁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패를 갈라 싸울 때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일 뿐인 것이죠.
좌우 구분 없는 선악의 이분법
영화 ‘남산의 부장들’ 한 장면. [사진 쇼박스]
권위주의 세력이 냉전 반공주의를 통해 가치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아군과 적군만 존재하는 이분법적 사회를 만들었듯, 지금의 집권 세력도 ‘적폐·친일’이라는 프레임으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복잡다단한 시민의 이익과 사회 균열·갈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 위해 반공과 적폐 프레임을 활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 균열을 정당이 대표하지 못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큰 위협입니다. 균열 지점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것은 ‘대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며, 그 결과 시민들의 혼란과 갈등이 커집니다. 광장이 둘로 쪼개져 치열하게 싸우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선거에선 어떤 균열을 축으로 경쟁이 이뤄지는지, 정당은 무슨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문재인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 ‘박근혜를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 뿐입니다. 이 같은 ‘진영 논리’가 한국 정치의 기저에 흐르며 반지성주의를 키우고 자유주의를 억압합니다. 단순히 두 개의 정치세력이 패를 갈라 진영 싸움을 벌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민단체·언론 등 시민사회도 진영 논리에 동원돼 두 개의 세력으로 수직계열화 돼버렸습니다.
건전한 내부비판까지 차단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성이 경희대 교수(한국정치학회장)는 “정책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크지 않지만 어떤 대통령,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느냐를 따지면 갈등이 첨예해진다”며 “이념에 따라 정파가 나뉘는 게 아니고 정파 갈등이 이념 갈등을 부추긴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 토론이나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이슈를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며 대립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죠.
더욱 큰 문제는 내부의 건전한 비판까지 차단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지적도 진영 논리를 벗어나는 순간 매장되기 일쑤입니다. ‘조국 사태’ 때 조 전 장관을 비판했던 김경율 참여연대 전 집행위원장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진보층 내부에서 궁지에 몰렸던 게 대표적인 사례죠.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조 전 장관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둘로 쪼개 놓은 ‘진영 논리’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일까요. 그 핵심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키는 반지성주의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이성이 감성으로 대체되고, 논리가 마비된 반지성주의는 가짜 민주주의를 부른다”고 경고합니다.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스나이더 교수가 지적하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와 가짜 민주주의 사례는 ‘러시아 스캔들’입니다. 줄리안 어산지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2016년 미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과 외교 문서를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방수사국(FBI)은 러시아 해커가 자료를 빼냈고, 이를 위키리크스에 전달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트럼프가 개입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대통령 취임 후인 2017년 5월 로버트 뮬러의 특검이 시작됐죠.
지난해 3월 특검은 “트럼프 측과 러시아가 직접 공모한 사실은 입증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뮬러 특검은 ”그렇다고 범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면서 러시아 조직의 대선 개입은 사실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특검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라는 조직을 통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미국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각종 여론 조작을 벌였습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뮬러 특검이 밝힌 러시아식 ‘댓글부대’인 IRA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 계정을 사용해 선전 활동을 벌였습니다. IRA는 470개의 페이스북 계정을 마치 미국의 정치·시민 단체가 만든 것처럼 위장하고 각종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IRA가 부추긴 미국의 반지성주의
IRA가 사용한 힐러리 반대 이미지. [BBC]
2017년 10월 페이스북이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IRA는 2015년부터 2년간 8만 건의 게시물을 올리고, 약 2900만 명이 이를 뉴스피드로 받아 봤습니다. IRA가 운영한 페이스북 페이지 ‘블랙 매터스 유에스'(Black matters US)‘는 백인에 대한 흑인의 적개심을 키우며 “힐러리는 흑인의 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동했습니다.
2018년 5월 미 하원 정보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서도 IRA는 총기 규제, 이슬람교, 동성애, 이민자 등과 관련한 자극적인 글과 사진을 올리고 확산을 유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를 들어 ‘허트 오브 텍사스(Heart of Texas)’라는 계정은 2016년 7월 경찰관 5명을 살해한 댈러스 총격범 미카 존슨에 대해 “이슬람 소유의 건물을 테러에 이용했다. 1만 명의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텍사스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썼습니다.
이는 물론 거짓이었습니다. 존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베테랑 군인으로 자신의 집에서 다량의 무기가 발견됐습니다. 당시 블룸버그뉴스는 “러시아가 미국인들의 불만을 자극해 혼란에 빠뜨린 명백한 증거”라고 지적했습니다. “IRA의 6개 페이지가 올린 콘텐츠는 시민들에게 3억4000만 번 공유됐다”며 “미국인 1억 3700만 명이 투표했는데 1억2600만 명이 러시아 조직이 올린 글을 봤다”고 지적합니다.
미 지식인들이 실망한 트럼프식 정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교수, 철학자, 정치경제학자.
미국 지식인들은 트럼프 당선 전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비판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17년 9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의 종언’ 이후) 민주주의가 어떻게 퇴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민주주의도 분명히 후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0년 전 소련의 해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선 자본주의가, 권위주의(독재)와의 경쟁에선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봤죠. 이렇게 자유민주주의의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냉전의 프레임으로 작동했던 20세기의 역사는 끝났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미국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미국의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쌓아온 민주적 가치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트럼프식 정치에 큰 절망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트럼프는 수시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짜 뉴스로 치부하고, 해명이 어려울 땐 거짓말에도 거리낌 없습니다. 지난 10일에는 사법권 침해 발언도 서슴지 않았죠. 자신의 참모 로저 스톤이 ‘러시아 스캔들’ 관련 위증 혐의로 기소되자 “끔찍하고 불공정하다”고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심지어 법무장관인 윌리엄 바는 법원에 스톤의 형량을 낮춰 달라고 했죠. 그러자 법무부 전직 관료 1143명이 바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트럼프는 삼권분립의 원칙까지 훼손하며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의 지지율은 49%(2월4일 갤럽)로 여전히 굳건합니다. 스나이더 교수는 이를 ‘가짜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보다는 자극적인 언사가 대중의 사고를 좌우하면서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몰고 있다는 이야기죠.
‘O빠’ 광신적 팬덤도 가짜 민주주의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석방 촉구 집회 모습. [뉴스1]
한국도 마찬가집니다. SNS에선 거짓이 사실로 쉽게 둔갑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보다 광기가 대중을 선동하는 경우가 많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김어준’과 ‘유시민’을 대표적인 예로 듭니다. 지난 1월 jtbc 토론에서 그는 증거 인멸을 ‘증거 보전’으로, 부모의 대리시험을 ‘오픈북’으로 두둔한 ‘유시민’에 대해 궤변이라며 날선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괴벨스같이 선동하고 대중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세뇌된 대중은 명백한 사실조차 믿지 않는”(티머시 스나이더) 상황에 놓입니다. 아직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조작했다거나 세월호 사건 당시 ‘박근혜 7시간’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들이 대표적이죠. ‘음모론’은 픽션처럼 잘 짜여 있어 때론 사실보다 더욱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이처럼 정치를 혼란과 갈등으로 몰고 가는 가짜 민주주의의 근원은 과학과 이성, 사실을 부정하고 궤변과 독선, 거짓이 영향력이 절대적인 반지성주의입니다. 여기엔 합리적 토론이 사라지고 비판적 시민 대신 맹목적 팬덤만 남게 되죠. 정치가와 지지자를 엮는 것은 민주적 원칙이 아닌 종교적 맹신입니다. 소위 ‘박빠’, ‘문빠’와 같은 정치 팬덤은 상대를 ‘악’으로 몰고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하는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음 주 ‘온리버티’는 2019년 하반기 ‘조국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커져왔는지 ‘인지적 편향’의 이론으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더욱 자세히 따져보겠습니다.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2018 세종도서),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혜선씨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고 했다. 국내 굴지의 은행에 다니며 여섯 살 딸을 둔 워킹 맘인 혜선씨는 평일이나 주말이나,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그저 이 일 저 일을 바쁘게 처리하느라고 허겁지겁 산다고 했다.
사실 혜선씨만 그런 게 아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20세기 아날로그 시대 보다 훨씬 빠른 속도, 시간, 효율, 일을 요구한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 노인할 것 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정신없이(mindless) 살아간다.
그러던 혜선씨가 회사에서 마련해준, 몇 주 동안 마음을 챙기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에 참석한 이후 바쁜 일상에서 잠시 쉬고 마음을 정리하며 정신 차리고 사는 지혜를 터득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조그마한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혜선씨는 회사내 타부서나 회사 밖 고객과 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차례 전화나 문자 메시지, 카톡, 이메일을 보내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참으로 싫었다. 이 바쁜 와중에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다니… 때로 조급증이 솟아 오르고, 화가 나서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다들 자기 자리에 없는 거야?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아님 내 연락은 좀 나중에 해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 우습게 보는 거야?
그러던 중 반짝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금이 나를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구나!
바로 그 순간이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에게 다시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이 틈을 이용해 작은 호흡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슬로우’ 모드인 심호흡으로 바꾸는 것이다. 심호흡!. 천천히 숨에 집중해 들이쉬고 내쉴 때 바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몇십초, 아니 불과 몇초의 심호흡이라도 그녀가 회사의 정신없는 소란에서 정신적으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는 공간으로 인도했다.
얼마 후 그녀 눈에는 여러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커피 기계에서 커피가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회의실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 회의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 시간, 화장실을 오가는 시간, 하던 일을 끝내고 잠시 짬이 나는 시간 등등….
이럴 때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챙길 수 있었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지금 여기(here & now)에 주의를 모우는 시간. 예전에는 점심시간, 퇴근 후 그럴 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작은 틈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 느낌, 행동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일부러 자신에게 양분을 주는 활동을 늘리거나 소모 활동을 줄일 필요가 없었다.
혜선씨의 깨달음의 중요성은 매우 유의미하다.
우리는 휴식과 재충전을 통해 균형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항상 지금 현실과 떨어져서 별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점심시간, 퇴근 후, 주말, 아니면 휴가, 더 나아가 직장을 그만두거나, 장기 트래킹을 떠나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서 말이다.
그러나 혜선씨는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도망가기보다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와 믿음 뿐아니라 일상의 짜증나는 시간, 숨가쁜 순간, 때로 참기 힘든 스트레스 압력 속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품어 안고서 함께 가는, 더 다가가는 삶의 태도를 발견한 것이다.
일상에서 스스로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작은 틈이 어떤 것이 있을까. 예컨대 이런 것이다.
·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잠시라도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 가능하다면 회사 출근 할 때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걷고 타고 가는 시간이 오로지 내 시간이 된다. 자녀를 어린이 집에 보낼 경우 함께 손을 잡고 간다)
· 업무를 하나 마칠 때 마다 잠시 멈추고 30초 쉰다(명상한다)
· 팀장에게 결재하러 가기 전 잠시 마음을 정리한다.
· 화장실이나 다른 부서를 가기 위해 이동할 때 호흡과 마음을 조절한다.
· 직장에서 걸어갈 기회가 발견되면 적극 활용하라 마음챙겨서 걸어라.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용무가 없는 한 서둘지 마라. 서둘러야 할 때라도 마음 챙겨서 서둘러라
·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는 대신 3분 정도 밖으로 나가서 걷거나 서서 호흡하라.
실내에서라면 책상을 잡고 목과 어깨를 돌려라.
· 사무실 문을 닫고 5분 정도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시간 동안 호흡감각을 알아차려보라.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국내에서는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해외에서는 뉴욕, 워싱턴, 홍콩에서 세계를 지켜봤다. 대통령, 총리부터 범죄인, 반군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교류했으며, 1999년에는 제10회 관훈클럽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2018년부터 국내 저명한 심리학자들을 초빙, ‘8주 마음챙김 명상’ 강좌를 조선일보에 개설했다.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우울증 치유기 <나 요즘 마음이 힘들어서>, 40대 중년 위기를 다룬 <마흔이 내게 준 선물>, 한국 걸출한 인물들의 인생기 <내려올 때 보인다> 등이 있다.
미국 대선 기간 러시아 조직이 만든 페이스북 계정에선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부추기는 글이 많았다. [사진 BBC]
등장인물
티머시 스나이더
티머시 스나이더
(1969~). 한나아렌트상(2013) 등을 수상한 유명 역사학자(예일대)다. 홀로코스트 전문가로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와 전작인 『폭정』을 통해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트럼프 ‘스캔들 부인시 사면’ 제안”
뮬러 특검 “러시아가 미 대선 개입”
러 조직, 반힐러리 가짜뉴스 유포
괴벨스식 선전·선동이 우중 만들어
프랜시스 후쿠야마
프랜시스 후쿠야마
(1951~). 1989년에 쓴 논문 ‘역사의 종언’을 통해 구소련과 동유럽의 붕괴를 예측했다.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승리하며 냉전의 역사는 끝났다고 말했다. 현재 스탠퍼드대 교수.
로저 스톤
로저 스톤
(1952~). 19세 때 ‘워터게이트’ 관련자로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로비스트. 1980년대 트럼프와 처음 인연을 맺고, 적극적으로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그의 일대기는 넷플릭스 다큐로도 제작됐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알렉시스 드 토크빌
(1805~1859). 프랑스 귀족이자 정치가. 미국 여행 후 집필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와 시민참여의 필요성을 역설한 정치학의 고전이다.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는 결사·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1806~1873). 영국의 대표적인 공리주의 철학자. 이전 학자들은 주로 ‘의지의 자유’를 논의했지만 밀은 『자유론』에서 사회적(시민적) 자유를 고민했다. 자율과 개별성, 다양성 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지난주 미국 정가는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한 줄리안 어산지의 추가 폭로로 시끄러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부인하는 대가로 사면을 제안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면 백악관은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반박했죠. 정부 기밀문서를 누설한 어산지는 현재 방첩법(Espionage Act)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있습니다.
어산지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2016년 미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과 외교 문서를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방수사국(FBI)은 러시아 해커가 자료를 빼냈고, 이를 위키리크스에 전달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트럼프 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대통령 취임 후인 2017년 5월 로버트 뮬러의 특검이 시작됐죠.
지난해 3월 특검은 “트럼프 측과 러시아가 직접 공모한 사실은 입증하지 못했다”고 결론냈습니다. 다만 뮬러 특검은 “그렇다고 범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면서 러시아 조직의 대선 개입은 사실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특검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라는 조직을 통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미국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여론을 조작했습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뮬러 특검이 밝힌 러시아식 ‘댓글부대’인 IRA는 다양한 SNS 계정을 활용해 선전 활동을 벌였습니다. IRA는 470개의 페이스북 계정을 마치 미국의 정치·시민 단체가 만든 것처럼 위장하고 각종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2017년 10월 페이스북이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IRA는 2015년부터 2년간 8만 건의 게시물을 올리고, 약 2900만 명이 이를 뉴스피드로 받아 봤습니다. IRA가 운영한 ‘블랙 매터스 유에스(Black matters US)’ 페이지는 백인에 대한 흑인의 적개심을 키우며 “힐러리는 흑인의 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동했습니다.
미 지식인들 “트럼프식 정치에 참담”
2018년 5월 미 하원 정보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서도 IRA는 총기 규제, 이슬람교, 동성애, 이민자 등과 관련한 자극적인 글과 사진을 올리고 확산을 유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허트 오브 텍사스(Heart of Texas)’라는 계정은 2016년 7월 경찰관 5명을 살해한 댈러스 총격범 미카 존슨에 대해 “이슬람 소유의 건물을 테러에 이용했다. 1만 명의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텍사스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썼습니다.
이는 물론 거짓이었습니다. 존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베테랑 군인으로 자신의 집에서 다량의 무기가 발견됐습니다. 당시 블룸버그뉴스는 “러시아가 미국인들의 불만을 자극해 혼란에 빠뜨린 명백한 증거”라고 지적했습니다. 유명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IRA의 6개 페이지가 올린 콘텐츠는 시민들에게 3억4000만 번 공유됐다”며 “미국인 1억 3700만 명이 투표했는데 1억2600만 명이 러시아 조직이 올린 글을 봤다”고 지적합니다.(『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의 심장처럼 여겨지는 미국 대선의 한복판에서 러시아 조직이 주도한 선전·선동 활동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미국 지식인들은 트럼프 당선 전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비판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17년 9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의 종언’ 이후) 민주주의가 어떻게 퇴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민주주의도 분명히 후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0년 전 소련의 해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선 자본주의가, 권위주의(독재)와의 경쟁에선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봤죠. 이렇게 자유민주주의의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냉전의 프레임으로 작동했던 20세기의 역사는 끝났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미국 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미국의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쌓아온 민주적 가치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트럼프식 정치에 큰 절망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트럼프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짜 뉴스로 치부하고, 해명이 어려울 땐 거짓말도 거리낌 없습니다. 지난 10일에는 사법권 침해 발언도 서슴지 않았죠. 자신의 참모 로저 스톤이 ‘러시아 스캔들’ 관련 위증 혐의로 기소되자 “끔찍하고 불공정하다”고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심지어 법무장관인 윌리엄 바는 법원에 스톤의 형량을 낮춰 달라고 했죠. 그러자 법무부 전직 관료 1143명이 바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트럼프는 삼권분립의 원칙까지 훼손하며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의 지지율은 49%(2월 4일 갤럽)로 여전히 굳건합니다. 공화당 지지층에선 94%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죠.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거짓말과 전문성 무시, 민주주의 경멸을 스스로 합리화한다”며 “사실에 대한 무관심, 이성을 대체한 감성, 좀먹은 언어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진실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일찌감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극찬했던 미국의 민주주의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스나이더 교수는 이를 ‘가짜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보다는 자극적인 언사가 대중의 사고를 좌우하면서 중우정치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죠.
한국도 마찬가집니다. SNS에선 거짓이 사실로 쉽게 둔갑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보다 광기가 대중을 선동하는 경우도 많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김어준’과 ‘유시민’을 예로 듭니다. 지난 1월 jtbc 토론에서 그는 증거 인멸을 ‘증거 보전’으로, 부모의 대리시험을 ‘오픈북’으로 두둔한 ‘유시민’에 대해 궤변이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괴벨스같이 선동하고 대중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세뇌된 대중은 명백한 사실조차 믿지 않는”(티머시 스나이더) 상황에 놓입니다. 아직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조작했다거나 세월호 사건 당시 ‘박근혜 7시간’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들이 대표적이죠. ‘음모론’은 픽션처럼 잘 짜여 있어 때론 사실보다 더욱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안병진 교수는 “과학과 이성, 사실이 부정되고 궤변과 독선, 거짓이 대중을 움직일 때 ‘가짜 민주주의’가 확산된다”며 “합리적 토론이 사라진 공론장엔 비판적 시민 대신 맹목적 팬덤만 남는다”고 말합니다. 이때 정치가와 지지자를 엮는 것은 민주적 원칙이 아닌 종교적 맹신입니다. 소위 ‘박빠’ ‘문빠’ 같은 정치 팬덤은 상대를 ‘악’으로 몰고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하는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짜 민주주의’를 막는 길은 합리적 이성과 논리로 거짓 선동과 독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독선은 절대적인 권력과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며 ‘진리’ ‘절대선’ 같은 표현을 쓰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죠. 그 대신 “표현의 자유와 상대적 다양성을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세상의 어떤 현자도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자유론』)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금 어떨까요.
윤석만 사회에디터 겸 논설위원
#유튜브에서도 인간혁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Ipp-I9olmN4
매사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여성·이민자·소수자 탓하다가 포퓰리즘 정치가의 먹이로 전락
과거 집착과 타인에 대한 불신도 자신을 멍청이로 만드는 악덕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지음
이주영 옮김|시공사|400쪽|1만7000원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뛰어든 사람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른다. 쓸데없는 짓이다. 천천히 한 번 누르든, 다급하게 여러 번 누르든 엘리베이터는 최초의 터치에만 반응하고 정해진 속도로 움직인다. 오히려 주변에 준비성 없이 허둥대는 사람이란 인상을 주는 멍청한 행동일 뿐이다. 그런 사람을 보며 혀를 차는 당신도 멍청함의 포로이긴 마찬가지. 멍청함은 인간의 본성이란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보통 사람도 하지 않을 멍청한 짓으로 손가락질당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프랑스 심리학자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멍청함의 다양한 속성을 알아보기 위해 독특한 시도를 했다. 멍청함을 탐구하는 학자들을 인터뷰하거나 이 주제로 글을 받아 책으로 묶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 등 28명과 함께 개인적인 멍청함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사회를 해체하는 집단적 멍청함까지 두루 분석했다.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과거에 사로잡힌 멍청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 기억을 지우고 긍정적 기억만 남기는 인간 속성의 노예여서 미래를 계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을 믿지 못하는 것도 멍청함의 증거다. 그런 사람은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탔을 때 불안해하며 잠도 못 자지만 정작 자신이 운전대를 잡으면 졸음에 빠진다. 교만의 덫에 걸린 멍청이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자기는 개를 키우지 않으면서 남에게 개 키우는 법을 충고하고, “비행기 조종? 버스 운전과 다를 게 없지” 같은 헛소리로 자신의 멍청함을 폭로한다.
/시공사
멍청함은 자기가 속한 사회까지 병들게 한다.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매사 틀에 박힌 사고를 하고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모순되는 두 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신중함의 미덕을 몰라 “다 썩어빠졌군” “전부 장사꾼일 뿐이야” “기자? 비굴한 인간들이잖아”란 식으로 세상사를 거침없이 재단한다. “아는 것이 적을수록 확신이 커지는 탓”이다. 음모론에도 쉽게 빠져든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식으로 타인을 매도하고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다. 연기가 나는 진짜 이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멍청이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발 냄새가 나면 내 발이 아니라 양말에서 냄새가 난다고 믿는다. 과속 단속에 반복해서 걸려도 자신의 운전 습관이 아니라 “운이 나빠서 걸렸다”며 상황을 탓한다. 고용주라면 결코 이런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 자기를 과대 포장하는 성향 탓에 성희롱 사고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 네 탓’이 된다. 이들은 문제가 생기면 외부의 적을 찾는다. 이민자를 탓하고 여성과 유색인, 사회적 소수자를 비하한다. “여자는 여자일 뿐” “유대인은 유대인이다”처럼 ‘A=A’ 식의 사고 패턴을 보인다. 포퓰리즘 정치가의 좋은 먹이다. 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사회 지도층에 돌리고,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놓은 지도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팩트와 지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지도자에 끌려 정치를 타락시킨다.
필자 중 ‘탈진실’ 현상이 세상을 멍청한 곳으로 만든다고 분석한 신경심리학자 세바스티앙 디게의 글이 이목을 끈다. 그는 현대인이 정확하고 옳은 말이나 신중한 태도보다는 당당하고 열정적이며 감정에 호소하는 태도에 호감을 보인다고 진단한다. 이 때문에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인 믿음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이런 멍청한 성향을 더 멀리 빠르게 퍼뜨린다. 자신을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잣대로 삼기에도 좋은 책이다.
아테네의 전염병 창궐을 표현한 유화 ‘고대도시의 전염병’은 벨기에 출신 화가 Michiel Sweerts가 그렸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며 하나의 거대한 세균 번식장을 형성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기술의 발전이 대전염병(판데믹·pandemic)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6세기의 흑사병 사례를 예로 듭니다. 당시 이 병은 황제의 이름을 따 ‘유스티니아누스병’으로 불렸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도시의 발생은 세균 입장에선 맘 놓고 증식할 수 있는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대도시는 세균·바이러스의 훌륭한 먹잇감이 됐고, 교통의 발달은 이들이 멀리 퍼져나갈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 것이죠. 이처럼 개체 간 감염 자체는 자연현상이지만, 대전염병으로 번지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현상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컨테이전(2011)’입니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한 이 작품은 처음 최근 확산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비슷한 소재를 다뤘습니다. 영화 초반에선 홍콩 출장을 다녀온 미국인 여성 베스(기네스 펠트로)는 며칠을 끙끙 앓다 발작을 일으키고 응급실로 옮긴지 얼마 안 돼 사망합니다. 곧이어 아들까지 잃게 된 남편 토마스(맷 데이먼)는 마지막 남은 가족인 딸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합니다.
판데믹 상황의 혼란과 갈등을 실감나게 그린 영화 ‘컨테이전’. 홍콩의 박쥐가 감염의 원인으로 나온다. [영화 컨테이전 캡처]
며칠 후 아내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사망자들의 소식이 전 세계에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 온갖 소문들이 무성하게 퍼지면서 사람들은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죠. 생화학무기를 개발하던 연구소에서 바이러스가 유출됐다거나 기업들이 백신을 미리 개발해놓고도 큰 돈을 벌기 위해 은폐하고 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퍼집니다. 이에 정부는 부랴부랴 역학조사팀이 꾸려져 병의 원인을 찾아 나섭니다.
환자들의 감염 경로를 추적한 끝에 최초의 감염자가 홍콩의 한 식당 주방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야생 박쥐의 변을 먹고 자란 돼지를 요리사가 맨 손으로 다루면서 전염이 시작된 것이었죠. 이번 코로나19의 감염원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쥐일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사건 하나가 어떻게 전 인류를 위협에 빠뜨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마치 지구를 정복한 것처럼 착각하는 인류가 눈에 보이지도 낳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도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 그리고 교통이 발달한 곳일수록 대전염병에 취약하다는 것이죠. 이번 코로나19가 발병한 중국의 우한시도 인구 1000만이 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2002년 말 중국 광둥성에서 발생한 사스가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것도 홍콩에서 감염자가 나온 뒤였습니다.
나폴레옹이 1799년 전염병이 창궐한 야파(이스라엘 서부) 점령지 시찰 모습을 표현한 유화 ‘전염병 지역인 야파를 방문한 부오나파르’는 프랑스 출신의 화가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처럼 대전염병은 인간의 기술 발전이 만들어낸 사회현상입니다. 제일 처음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제일 처음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인류는 먹을 만큼만 사냥하고 늘 이동해 다녔습니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살았고, 동시에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축의 몸 속에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는 인간 면역에 길들여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죠. 각종 배설물 등 오염원에 노출되면서 인간은 전염병을 앓기 시작했고, 또 한 곳에 모여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병은 더욱 쉽게 전파됐습니다.
165년부터 180년까지 로마에서 발생한 ‘안토니우스 역병’은 동쪽의 파르티아와 전쟁 후 로마로 돌아온 병사들이 병균을 전파시켰습니다. 수백만 명의 로마시민이 죽었고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121-180)의 목숨까지 빼앗아갔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밀려드는 상인과 공직자, 순례자로 붐비던 고대 도시는 인류 문명의 산실인 동시에 병원균의 이상적 번식처였다”고 설명합니다. (『호모 데우스』)
프랑스 엘리앙에서 흑사병 피해자를 매장하는 장면을 그린 19세기 영국 판화 (부분). 『잉글리시 일러스트레이션, ‘60년대’: 1855-70』에 실렸다.
중세로 넘어오면서 도시가 커지고 교역이 활발해지자 전염병의 파괴력도 강해졌습니다. 중세 유럽을 뒤흔들었던 흑사병은 1346~1352년 75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당시 유라시아 인구의 4분의 1이 넘었죠. 의학기술이 진일보한 1918년에도 스페인 독감으로 25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사망한 군인(약 1000만 명)보다 훨씬 많았죠.
어떤 전염병은 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1529년 스페인 군대의 침략으로 멸망한 아즈텍은 전쟁보다 천연두로 사망한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2000만 명에 달했던 아즈텍 인구는 1618년 160만 명으로 급감했죠. 1531년 168명에 불과한 프란시스코 피사로(1475-1541)의 군대가 잉카제국의 8만 군대를 무너뜨린 것도 천연두 때문이었습니다. 전쟁보다 유럽인들이 퍼뜨린 전염병으로 훨씬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전염병에 감염돼 참화를 겪는 십자군을 표현한 판화 ‘나일강의 십자군’은 프랑스 출신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작품이다.
이처럼 전염병은 인류에게 가장 큰 위협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보다 코로나19처럼 덜 치명적인 경우가 판데믹의 위험성이 더 크다는 점입니다. 1976년 콩고에서 처음 발견된 에볼라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체를 매개로 전염되는 에볼라 바이러스는 아마존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큰 밀림인 콩고분지(362만㎢)를 넘지 못했습니다. 일주일 안에 치사율이 최대 90%라는 점도 확산이 더딘 이유였습니다. 리 골드먼 미국 컬럼비아대학병원장은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도 소멸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오히려 전염이 어렵다”고 합니다. (『진화의 배신』)
하지만 코로나19처럼 숙주의 생명에는 큰 지장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무증상 상태에서도 감염을 시키는 바이러스는 대전염병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과정에서 바이러스는 “인간의 면역체계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분자구조를 변화시켜 생존을 이어나가는데, 이는 진화의 한 방식”입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과거의 전염병 사례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세계보건기구·『총·균·쇠』]
그런데 문제는 이제 치명적인 바이러스도 하루 이틀이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미줄 같은 교통망은 인간을 촘촘히 연결해 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파율도 높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바이러스가 있다면 인류에겐 재앙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의학 저널리스트 소니아 샤는 “지난 50년 간 300종 이상의 감염병이 예전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지역에서 새롭게 출현했고 다음 두 세대 안에 인류에 치명적인 판데믹 바이러스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판데믹: 바이러스의 위협』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발견된 3만년 전의 고대 바이러스. [Phys.org)
몇 년 전에는 빙하에 갇혀 있던 고대 바이러스가 발견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영국의 과학기술 전문매체 ‘Phys.org’는 2015년 8월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몰리바이러스 시베리쿰’을 기획기사로 다뤘습니다. 이를 발견한 프랑스국립과학센터의 장 미셀 클라베리 박사는 “3만 년 전의 바이러스가 완벽한 냉동 상태로 죽지 않고 보존돼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아직까지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전염시키는지, 나아가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3만년의 시간이동을 한 바이러스가 어느날 갑자기 사람에게 전염되기 시작한다면 엄청난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연두 바이러스에 몰살된 아즈텍과 잉카처럼 인간은 면역이 없는 항원에 취약하기 때문이죠.
인간은 생태계에서 유일하게 천적이 없는 종입니다. 기원전 1억 명에 불과했던 인류는 3년 후면 80억 명을 돌파합니다. 자연은 늘 생태계의 위협이 되는 종에겐 천적을 만들어 균형을 맞춰 왔죠. 현재 인류의 가장 큰 천적은 바이러스가 그 자신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판데믹에 대비해야 할 것은 비단 백신뿐일까요?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2018 세종도서),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프로 농구경기를 보면 계속 승승장구, 앞서가다가 마지막 1~2분 사이에 전세가 역전돼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게임을 종종 본다. ‘마지막 시간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지고 있는 팀 선수들은 시간을 아끼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이기고 있는 선수들은 시간을 끌거나 몸보신을 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인생의 승자도 평소 시간관리, 특히 마지막 시간 관리를 잘한 사람들 중에 많다. 인생의 시간을 잘게 쪼개면 결국 하루다. 하루의 시간 관리를 잘할수록 당신의 인생 승리 가능성도 높아진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침이나 낮의 시간 관리는 잘하는 편이지만 저녁 이후 시간 관리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산뜻한 아침 출발은 중요하다. 낮에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저녁 잠자리에 들었을 때다. “오늘 하루 잘~보냈다”고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 하루 망쳤다”고 한탄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가족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특히 저녁 시간이 그랬다. 평일 집에서 저녁을 드는 날은 거의 없었고 보통 자정 너머 들어왔다. 1주일에 하루 쉬는 휴일에도 골프다 등산이다 종일 바깥에서 나돌았다. 결국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은 잠자는 시간 외에 별로 없었다.
이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내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한강의 기적’ 시대에 살아온 우리네 중-장-노년 세대는 이런 생활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
한마디로 ‘저녁이 없는 삶’에서 살았다.
10여년전 어느 지자체 단체장은 신문에 이런 기고를 했다.
한국인은 선진국 사람보다 훨씬 덜 연구하고 공부한다. 한국 성인 1인당 독서량이 192개국 중 166위라는 UN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인들은 이 부족분을 인맥과 로비와 ‘배째라’라는 저돌성으로 충당하며 사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가지다. 친목 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중략)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공무원이건, 직장인이건, 사업가건, 교수건, 법조인이건, 예술인이건 예외가 없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은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 황주홍 강진군수(현 민주당의원), 조선일보 2008.10.21
요즘은 그때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지치고 소모적이다.
선진국의 저녁은 우리네와 참 많이 달랐다. 처음 해외생활을 하던 1987년 내가 살던 뉴욕은 오후 4시반이면 퇴근 러시아워가 시작됐다. 저녁 6시 정도면 대부분 집으로 귀가해 가족들이 식탁에 앉아 함께 저녁을 든다. 그런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저녁 메인 뉴스시간이 오후 6시반 내지 7시였다. 당시 우리 저녁뉴스시간은 9시였다.
한국에서 밤늦게까지 술 마시던 버릇이 있던 나는 어둠이 깔리면 적막강산으로 변하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술집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1994년 워싱턴 DC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캐나다 등지를 여행할 때도 관광객이 몰리는 일부 유흥가 지역을 제외하고는 밤은 대체로 조용했다.
그네들도 낮에는 살벌한 생존경쟁에 몰두하지만 저녁에는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했다. 긴장되고 냉철했던 사람이 저녁에는 느슨하고 선한 사람으로 바뀐다. 조직의 안녕보다 개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한다.
왜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한가.
우리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전쟁터에서 지친 몸을 가정에서 쉬게 해야 한다. 힐링(healing)할 필요가 있다. 가족과의 저녁에서 자연스럽게 유대감이 제고된다. 그것이 다시 나를 휴식케 만든다. 아늑한 가정의 품안에서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그것이 내일을 위한 에너지와 지식의 충전으로 이어진다.
저녁을 잘 보내야 잠을 잘 자게 되고, 잠을 잘 자야 이튿날 아침이 상쾌한 법이다. 선순환이다. 저녁이 좋으면 하루가 다 좋다.
잠을 못자면 정신 건강도 해친다. 우울증 환자는 종일 온갖 부정적 상념에 시달려 지내다가 그 연장선상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며, 이튿날 아침은 정신적으로 최악의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것이 악순환처럼 반복되면서 증세는 점점 깊어진다.
한양대 유영만 교수(교육공학)는 저녁을 잘 보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하루를 정리하기 위한 5R’을 권고한다.
⊙ Reflect(성찰): 하루 일어난 일 중 좋은 일 다섯 가지와 나쁜 일 다섯 가지를 나눠 조용히 복기하고 정리해본다.
⊙ Rediscover(재발견):하지 못한 일, 지나가버린 일, 간과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의미를 찾는다.
⊙ Reconnect(관계회복): 하루 동안 만났던 사람을 회고해보고 새로운 관계를 추구해본다.
⊙ Read(독서): 책 읽는 것 자체가 하루를 정리하는 화두를 찾는 것이고 내일을 기획하려는 마음가짐이다. ⊙ Relax(휴식):앞만 보고 달려온 하루, 또 다른 하루를 구상하기 위해선 지금 몸과 맘을 쉬게 해야 한다.
# 사족
우리 일생에서 저녁시간은 얼마나 될까.
‘평균 수명 100세 시대’로 따져볼 때 1년 365일이 100년이면 36,500일이요, 시간으로 따지면 87만6,000시간이다. 이중 저녁시간(오후 6~11시)을 5시간으로 잡으면 평생 저녁시간은 18만2,500시간이다. 당신이 50세라면 아직 그 절반인 9만1,250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총 3,800여일, 1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다.
자, 오늘부터 우리의 저녁을 회복하는 것이 어떨까. 저녁을 먹고 아내와 둘이, 아니면 가족 모두가 산보를 나가는 것도 좋다. 아무도 따라 나오지 않는다면 나 홀로 산책을 즐긴다. 동네 주변이나 인근 풍경을 찬찬히 음미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서재나 거실에서 음악을 듣거나 하루를 정리해본다. 반성도 하고 계획도 세우고 시간이 남으면 독서도 하면서 재충전한다. 일기를 쓰는 것도 좋다. 종교인이면 종교서적도 보고 기도도 하라.
옛날에는 가난했어도 온 가족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저녁을 같이 먹었다. 어린 시절 떠들다가 어른들로부터 자주 혼도 났지만 늘 오순도순 즐거운 편이었다. 그렇게 사람 사는 법을 익히고 사람과 사람 속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달님과 별님을 보며 공상을 키우던 옛 시절, 멀리서 들리는 개짖는 소리, 고즈넉한 주변 마을. 비록 가난하고 무지했어도 그때는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지금 우리보다 훨씬 편하고 인간적이었던 것 같다.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국내에서는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해외에서는 뉴욕, 워싱턴, 홍콩에서 세계를 지켜봤다. 대통령, 총리부터 범죄인, 반군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교류했으며, 1999년에는 제10회 관훈클럽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올해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창간해 대표로 있다. 저서로 <나 요즘 마음이 힘들어서>,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등이 있다.
세면대 위 거울에 보이는 나의 부스스한 모습, 피곤에 쩌 든 모습… 상쾌한 아침이기는커녕 늘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엉켜 시작한다.
이따 10시 예정인 부서 회의자료 마무리, 결재서류 만들어야 하고 오후에는 외부 미팅, 또 그 이후에는… .
게다가 함께 일하는 고참 대리의 잔소리, 과장님의 업무 떠넘김, 부장님의 실없는 농담… . 점심시간마저 혼자 쉴 수 없이 같이 마주봐야 하는 것에 짜증이 솟는다.
그래도 난 싱글이라 괜찮은 편이다. 아이 키우며 회사 다니는 선배 워킹 맘들은 얼마나 힘들까.…
세면대 앞에 선 짧은 몇 초 동안에 이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명멸하고 지나간다. 마음 한구석에선 도대체 인생을 이렇게 피곤하게 살 이유가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양치질 하는 속도가 나도 모르게 빨라진다. 괜히 가슴 한구석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 같다. 그저 대충대충 양치질과 세수, 그리고 머리 매무시를 바로 잡고 나온다. ”
바로 이것이 지영씨를 포함한 요즘 직장인 대부분의 아침 풍경이다.
양치질이나 세수 같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이고 간단한 일에도 제대로 정신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살아간다. 몸 따로, 생각 따로.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정신없이(mindless) 살아가고 있다.
생각과 공상이 계속 번갈아 교차한다. 대부분의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고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자동조종(auto-pilot)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 지영씨 같이 바쁜 입장이 아닌데도 아침마다 조바심이 들며 매사 빨리 빨리 해치우려는 경향이 남아 있다. 딴 생각을 하면서 면도, 양치질, 세수, 샤워를 일사천리로 해낸다. 이것은 오랜 습관의 결과다. 나의 신체·정신은 이렇게 패턴화 돼 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은 이런 ‘자동조종 상태’를 빨리 인식하게 됐다는 점이다.
아침마다 나는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다 보면 금새 딴 생각으로 빠져버린다. 빨리 샤워를 끝내고 해야 할 일이 많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손이 빨라진다. 그때…
아, 내가 또 정신없이 사네.
또다시 마음 속 지령이 나온다.
‘마음 차렷! 지금 여기(here & now)에 집중!’
순간 건성건성 샤워하던 나의 움직임은 느려지고 잡념 대신 샤워 물줄기가 피부에 닿는 촉감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따듯한 물이 전신을 훑으며 지나갈 때 느껴지는 안온함. 머리, 얼굴을 비롯 온 몸에 비누칠을 할 때 내 동작의 움직임, 그리고 그것과 닿는 피부의 느낌에 정신이 집중된다. 나의 마음은 오로지 이 샤워실내 내 몸과 물, 그리고 비누칠에 집중돼 있다.
마지막으로 찬 물로 몸 전체를 다시 한번 샤워한다. 차가움에 신체 감각들이 갑자기 긴장하면서 반응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5분 정도 온전하게 샤워를 한 뒤 밖으로 나와 타월로 몸을 닦는다. 이어서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간단히 스킨로션을 얼굴에 바른 후 욕실을 빠져 나온다. 이렇게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면 딴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어느새 잡다했던 머리는 개운해지고 마음도 안정을 되찾는다.
바로 이것이 ‘지금 여기’에 사는 법이요, mindless(정신없는)에 반대되는 mindful(정신차린) 삶이다.
혹자는 이렇게 일상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 더 힘들고 스트레스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No!.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할 때 마음이 쉰다. 번잡한 생각은 사라지고 나가놀던 산만한 마음은 제 자리를 찾는다. 에너지 소모가 확 줄어든다. 우리 뇌 속에서 ‘전투 모드’의 교감신경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평화 모드’의 부교감신경이 지휘권을 잡게 된다.
산만한 마음을 바로 잡는 법은 여러 가지다. 흔히 생각의 생각을 통해 해결하려고 들거나 아니면 산만한 마음 자체를 억누르려고 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게 된다. 마음은 정면대결을 통해선 좀처럼 이겨내기 어렵다.
대신 우회적 방법을 사용한다. 심호흡을 한다거나, 이처럼 ‘지금 여기’ 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에 희망을 품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매 순간 현재 일어나는 것을
통찰력을 갖고 보라.
굳세게 흔들림 없이
이것을 알고 이것을 확신하라.
– 경전 ‘지복한 하룻밤(One Fortunate Attachment)’에서
◇세면실에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법
1. 면도할 때는 면도, 양치질 할 때는 양치질, 세수할 때는 세수, 샤워할 때는 샤워, 화장 할 때는 화장에만 마음을 집중하라
2. 중간에 다른 생각이 들면 ‘아 다른 생각을 했구나’ 알아차리고 지금 동작에 다시 주의를 집중한다.
* 이때 ‘왜 나는 집중을 잘 못하지’하고 자기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오히려
‘잘 알아차렸네’라고 자신을 격려하고 다시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3. 가끔 내가 몸과 호흡의 상태에 귀를 기울여보라.
* 몸의 특정 부위에 통증이 오면 이상이 있다는 징후이며, 쓸데없이 숨이 가빠지면
의도적으로 천천히 숨을 쉬도록 유도한다.
4. 이런 식으로 세수하는 전 과정을 알아차림하라.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국내에서는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해외에서는 뉴욕, 워싱턴, 홍콩에서 세계를 지켜봤다. 대통령, 총리부터 범죄인, 반군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교류했으며, 1999년에는 제10회 관훈클럽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올해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창간해 대표로 있다. 저서로 <나 요즘 마음이 힘들어서>,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등이 있다.
중국인들이 술자리에서 종종 언급하는 말 중에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이란 말이 있습니다. ‘군자가 원수를 갚음에 있어서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입니다. ‘원한이 있는데 갚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는 ‘유구불보비군자(有仇不報非君子)’란 말도 있습니다. 둘 다 중국 무협지와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말입니다. 성인(聖人)의 전 단계로 유교사회의 이상형이란 군자(君子)를 복수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단어와 결부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중국인의 특질을 설명하는데 ‘복수’ ‘보복’보다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의 명재상 오자서(伍子胥)는 부친과 형의 복수에 성공한 뒤 이미 죽은 원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시신이 훼손될 때까지 300번이나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굴묘편시(掘墓鞭屍)’란 고사성어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은 ‘복수’ 하나만을 목표로 땔감 위에서 잠을 청하고, 쓸개를 핥아먹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뒤 각각 복수에 성공했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유언으로 남겼다는 ‘칼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의 ‘도광양회(韜光養晦)’도 복수와 보복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한·중 관계가 위태위태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상당수 한류(韓流) 스타들이 영문도 모른 채 행사가 취소되고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습니다. 한류 스타들의 프로그램 출연 제한령을 뜻하는 ‘한한령(限韓令)’이 인터넷에서만 떠돌았는데, 홍콩의 유력 시사주간지인 아주주간(亞洲週刊)이 커버스토리로 다룰 정도인 것을 보니 그 여파가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중국인들은 국제관계를 대국(大國)과 소국(小國)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인구 1억2000만명의 GDP 세계 3위의 일본마저 비하하는 뜻의 ‘소일본(小日本)’이라고 부를 정도이니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큰 대(大)’ 자가 들어가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호에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대국 옆에 살아야 하는 소국 사람 입장에서는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대국 옆에서 소국이 살아가려면 적정한 인구에 더불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외교적으로 한국보다 북한을 후대(厚待)하는 까닭은 사실상 ‘핵(核) 보유국’이란 지위 탓도 있습니다. 사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적 방어수단에 불과합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성정이 급해진 요즘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군자보구 십년태만(君子報仇 十年太晩)’이란 말도 나옵니다. ‘군자가 원수를 갚음에 있어서 십 년은 너무 늦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보복은 하되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중국인들이 빼들 향후 보복카드를 면밀히 예의주시하고 현명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입니다.
“선한 사람 기회 더 많이 가져” 데이터가 속속 증명 스펙과 공채 사라져… 좋아하는 일 해야 직업 유지 데이터 투명 사회… 키워드는 공정성, 유연성, 독립성 권력도 1/n… 상하 없는 ‘어벤져스’팀, 크루들의 결합 어제 오늘 비슷해 보여도, 5년 10년 단위로 큰 변화
다음소프트 부사장 송길영. 대중 언어가 탁월한 국내 최고의 빅데이터 해석가./사진=이태경 기자
2020년이 다가왔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올해의 주요 키워드로 도움을 얻기 위해 데이터분석 기업 다음소프트의 송길영 부사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송길영은 방대한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하는 국내 최고의 빅데이터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전산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그가 해석하는 ‘데이터 신호’는 기계적인 소비자 수치가 아니라 심리학, 윤리학, 인류학의 시그널로 읽힌다.
지난 20년간 소셜미디어에 쌓인 수많은 욕망을 분석하면서, 송길영은 자신을 사회적 마음을 캐는 광부라고 정의했다. 대중의 마음을 읽으면 ‘원하는 것을 주고 원하지 않는 것을 안 줄 수 있다’. 데이터는 확실히 시장의 에러를 줄여주지만, 한편으론 그 변화 속도가 빨라 오늘의 상식이 내일의 오류가 되는 걸 보면 무상하기도 하다.
10년간 융성했던 스펙 관련 키워드가 희미해지는 걸 보며, 그는 공채가 사라지고 제너럴리스트는 그 효용을 다했다고 진단했다. 앞으로는 좋아하는 일을 깊게 수련한 스페셜리스트가 살아남고 ‘혼자 사회’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데이터 노출로 선행과 악행의 결과는 빛 가운데 더 빨리 더 투명하게 드러나니, 이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옛말이다. “착하게 살면 기회가 더 많이 온다”는 당위조차 데이터로 증명되는 공정 사회다.
인터뷰를 통해 올해에 도포된 얇은 트렌드를 취하려 했으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 눈을 들어 멀리 10년 후를 보고 계획을 세우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남동 다음소프트 사옥에서 송길영을 만났다. 지하카페테리아는 커피와 맥주가 종류별로 다양했고, 외부로 통하는 문은 히든 도어로 신비감을 더했다. 아카데믹한 공기를 비집고 신해철을 닮은 명랑한 사내가 들어섰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 리드미컬한 말투, 여러 층위가 섞여 쏟아져 나오는 텍스트의 경사가 가팔라 디지털 곡괭이를 든 광부라기보다 빅데이터 계의 록스타나 래퍼처럼 보였다.
-무엇을 보고 있나요?
“인스타그램 이미지요. 텀블러 하나도 신(Scene)마다 다 달라요. 컬러풀한 킨토는 네일아트를 강조하고, 스테인리스는 아웃도어, 블루버틀은 내 차가 미니쿠퍼라는 걸 자랑할 때 나와요. 이미지만 봐도 어떻게 팔아야 할 지가 보이죠. 호텔도 바깥 풍경 사진은 포도호텔이나 제주 신라가, 객실과 인피니티풀은 아난티 호텔이 잡혀요. 떠오르는 이미지가 곧 브랜드예요.”
-송길영이라는 사람은 어떤 이미지로 읽히나요?
“자주 등장하는 그림은 강연, 키워드는 빅데이터, 슬로건은 마이닝 마인즈, 강력한 이미지는 긴 머리. 한마디로 전공이 IT인 머리 길고 이상한 사람이에요(웃음).”
송길영은 소비자가 어디를 가고 뭘 먹고 어떻게 노는지 소셜미디어로 욕망을 통찰한 책 ‘상상하지 말라’을 펴내기도 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왜 스스로를 마인즈 마이너(Minds Miner)라고 부르지요?
“데이터는 마음의 편지예요. 저는 소셜미디어라는 광산에서 마음의 편지를 캐서 읽어요. 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고 복수로서의 ‘소셜 마인즈’를. ‘마이닝 마인즈(Mining minds)’라는 슬로건을 찾아내는 데 6년이 걸렸어요. 그동안 고민한 거예요.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나? 빅데이터를 들여다본 건 트렌드 예측이 아닌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어요. 목표는 인간 이해고 데이터는 그 도구였던 거죠.”
-데이터의 징후는 어떤 방식으로 파악합니까?
“가령 2012년부터 ‘술 마시다’ 보다 ‘커피 마시다’라는 키워드가 더 많이 잡혔어요. 머지않아 갈증 해소 음료로 아메리카노가 뜨겠구나 싶었죠. 그때만 해도 아메리카노는 잘 안마셨어요. 그런데 2017년부터 커피 행동을 분석했더니 아메리카노에 대한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예측이 사실로 온 거죠.”
-최근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열풍도 갈증 해소의 연장선이었군요. 이런 소비 패턴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신호로 잡혔다는 거죠?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바꿔말하면 올 것을 미리 알면 대비할 수 있다는 거죠. 데이터는 계속 시그널을 보내고 있어요. 임계가 넘어가면 그 변화가 급격해집니다.
가령 TV의 힘이 떨어지면서 매스미디어의 양태가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TV채널 파워는 떨어졌지만, 취향과 깊이는 다변화됐죠. 유튜브나 페이스북 사용자는 스스로 매스미디어의 생산자로 시장에 진입했어요. 수요자 위치에 머물지 않고 생산자로 사고해야 기회가 보여요.”
-최근엔 ‘펭수’나 ‘유산슬’만 봐도 공중파와 유튜브가 연합하고, 방송사 간의 경계도 희미해졌더군요. 그 변화의 진폭이 놀라우면서도 또 한편 자연스러웠어요.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니까요. 매일 똑같아 보여도 아이들은 어느새 키가 커서 훌쩍이잖아요. 회식에서 술 파도를 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그런 풍경이 보기 힘들어요. 아빠는 일찍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하고, 사무실은 코워커 스페이스로 바뀌었죠. 사람들은 한 달 살러 제주도로 가요. 어제와 오늘이 비슷해 보이는데 5년, 10년 단위로 보면 확 바뀌어 있어요.”
-당장은 변화가 빠른 듯도 느린 듯도 하여 혼란을 겪습니다. 플랫폼이 바뀌어도 전통 산업은 유지가 되고 있으니, 당장 올해 계획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고민입니다.
“그럴 땐 목표의 거리를 늘려야 해요. 내년이 아니라 10년 후를 생각해야죠. 매일 데이터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시야를 멀리 가져가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구나.”
“스펙 쌓기는 이제 필요없어요. 오래 일을 파고들려면 그 일을 좋아해야 해요.”/사진=이태경 기자
-요즘 잡히는 큰 그림은 뭐죠?
“스펙에 대한 회의에요. 지난 10년간은 스펙이라는 키워드가 엄청나게 늘었었죠. 봉사, 공모, 해외 경험 등으로 청년들이 어마어마한 경쟁을 했어요. 대학 받고 대학원 더, 이런 식이었죠. 오죽하면 ‘퇴사학교’의 장수한 대표가 쓴소리를 했습니다. “쓰지도 않을 자원을 계속 축척하고 있다”고. 40만 공시족에게 스펙은 대기권 탈출할 때까지만 쓰는 로켓, 입사 후엔 무용지물이라는 거죠.”
-앨빈 토플러도 지적했죠. 한국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을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요.
“그런데도 여전히 토익갱신병 같은 게 있었어요. 이직을 위해 다시 토익 시험을 치고 점수를 따는 거죠. 심지어 위험물취급사 같은 자격증도 따요. 혹 나중에 도움이 될까 봐.”
-불안 때문이겠지요.
“목표가 없어서예요. 방향을 모르니 그냥 “뭐라도 하는 상태”를 반복하는 거죠. 그런데 스펙이 필요했던 공채 시험 자체가 이젠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공사나 금융권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제너럴리스트는 더 이상 불필요한 시대가 온 거죠. 실제로 평균적인 일은 AI가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RPA)로 다 하고 있어요. 몇 년 전부터 데이터가 예고한 풍경이 현실이 되는 걸 보면 놀라워요.”
-송 박사의 강연을 들어보면 기업에는 “상대가 원하는 걸 하라. 그러기 위해선 데이터를 관찰하라”고 코칭하고, 개인에게는 “네가 원하는 걸 해라. 그러기 위해선 너를 탐색하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가 어떻게 충돌 없이 연결이 되나요?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모든 사회적 비즈니스의 관심사인데요.
“일단 조직은 고객의 마음을 얻어야 물건을 팔 수 있으니, 당연히 상대를 연구해야죠. 개인은 직업에 대한 조언이에요. 전 무조건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해요. 기존 직업 중 평균적인 일은 다 AI로 대체되고, 이젠 깊게 공부하고 수련하는 사람만이 직업 세계에서 살아남아요. 덕후들의 시대죠. 그런데 오래 그 일을 파고들려면 그 일을 좋아해야 해요. 싫어하는 일은 절대 길게 잘할 수 없잖아요(웃음).
뿐인가요. 내가 잘해도 새로운 일을 이 사회에 안착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3년은 해야 진정성이 확보되고, 그 과정에서도 내가 하는 일을 꾸준히 사방에 알려야죠. 제가 강연을 많이 한 것도 필요해서였어요. 그런 과정에 신용이 생기고 기회가 늘어나죠. 우연히 벌어지는 일, 스킵해도 될 일은 없어요. 차근차근 다 계단을 밟게 돼 있어요.”
-그 와중에 방시혁과 봉준호는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상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방시혁은 보편적 메시지의 좋은 콘텐츠로 취향 공동체의 열광을 끌어낸 게 성공 포인트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보세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 고민을 많이 했나? 일단 그들은 이 질문에 충실한 사람들이에요. BTS는 유저들에게 숨은 메타포, 즉 이스터에그를 많이 심어둬요. 보통 팬들이 봐도 예쁜 보이그룹인데, 열성 팬들이 보면 더 깊게 보이죠. 고민의 총량이 완성도를 높인 거예요. 원히트 원더는 운이에요. 계속하려면 체력이 요구돼요. 그 힘듦을 버틴 건 그 일을 정말 좋아해서죠.”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BTS의 성공에 대해 기조 연설하는 방시혁.
-보편적 메시지는요? BTS의 ‘러브 유어셀프’나 ‘기생충’의 계급 이슈가 전 세계 트렌드와 맞닿았다고 보는데요.
“두 결과물은 공정성과 투명성, 개인이라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어요. 문화상품은 그걸로 전 세계를 연결하니까요. 트렌드와는 범주가 좀 다릅니다. 트렌드는 지금도 수천만 개가 있어요. 지금 뜨는 소셜살롱만 봐도 외롭다, 어울리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등 굉장히 다양한 층위가 결합해 있어요. 그래서 트렌드는 발견보다는 메타화 추상화의 영역이에요. 방시혁과 봉준호는 그보다 공감의 코드가 넓고 그들을 지지한 코어 집단이 많았던 거고요.”
-주로 어떤 데이터를 봅니까?
“이미지와 동영상, SNS 뉴스피드와 커뮤니티 댓글까지 전부 보고 있어요. 20년 데이터가 쌓이니 페타급을 넘어섰습니다.”
-산처럼 쌓인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하지요?
“패턴을 봅니다. 언어 분석, 심리 분석으로 데이터를 남긴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요. 가령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가 식사 행위가 아니라 연민의 표현이잖아요.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차리려면 인지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종교, 철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저는 컴퓨터 전문가라 화자의 말을 해석할 수 없어,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뭐야?” “저건 뭐야?” 데이터 언어는 곧 인간의 이해더군요. 그분들을 지금 다음소프트 직원으로 초빙해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웃음).”
-사실 송 박사에게 인터뷰를 청한 건 독자들에게 2020년의 트렌드를 알려주기 위해서였어요(웃음).
“하하. 저는 트렌드 족집게 과외는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좀 더 넓게 지금 사회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길 즐기지요. 우리의 인식이 12월에서 1월로 달력이 바뀐다고 변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거시적으로 봐야죠.”
-데이터가 말하는 인간은 어떤 모양입니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존재죠. 원형의 욕망, 인정 욕구, 소셜 밸류에 대한 갈망이 합쳐져서 살아가는 집단이에요.”
-최근 나는 두 명의 데이터 전문가를 인터뷰했습니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그리고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안나 로슬링입니다. 구글 출신의 데이터 과학자들답게 그들은 항상 추측하지 말고 ‘데이터를 보라’고 하더군요. 세스는 인간이 검색창에 쏟아놓는 어두운 욕망에, 안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낙관에 몰두했습니다. 두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뽑아낸 메시지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우리 모두 공평하게 엉망진창, 그것이 또한 위로될 것” 또 하나는 “가난, 혐오뉴스에 속지 마라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였어요. 데이터로 보여주고 싶은 당신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단 크게 보면 인류는 나아지고 있죠. 하지만 그게 당장의 개개의 한 인간에게 도움이 되나? 그건 모르겠어요. AI로 인해 육체노동이 창조적 지식 노동으로 전환되는 건 발전이지만, 당장 현장 노동자들에겐 버거운 변화죠. 그 과정에 실업과 구직 등으로 수많은 희로애락이 생겨요.
데이터에서 내가 본 인생은 밝고도 어두워요. 나에 대한 인지, 내 눈높이가 어느 레벨에 있는지에 따라 반응은 다 달라요. 그래서 내 슬로건이 마이닝 마인즈( Ming Minds)예요. 마인즈는 복수, 개개 인간의 마음의 합이죠. 저는 최선을 다해 그 마음의 합, 현재의 상식을 캐내려고 하는 거고요.”
상상하지 말고 먼저 데이터를 관찰해야 한다.
-세스 다비도위츠는 ‘어두운 디지털 고해소’인 검색창과 ‘지나치게 밝은 쇼윈도’인 페이스북을 동시에 들여다봐야 균형 잡힌 삶이 보인다더군요.
“인스타그램은 더해요. ‘해피 해피 해피’죠. 다른 사람의 포스팅을 보면 우울감까지 들죠. 저는 데이터의 메시지를 창구에 따라 더 세분화해서 읽어요. 구글이나 페이스북뿐 아니에요. 지역 카페, 무기명 블라인드, 쇼핑몰 댓글, 인스타그램… 목적에 따라 데이터 소스를 한정해서 가공합니다. 말했듯이 사람들은 공간마다 다른 의도로 흔적을 남기니까요.
샘플링으로 추정하는 통계와는 달리, 데이터는 모집단 전체를 볼 수 있어요. 놀라운 분류 기술로 그게 가능해졌죠. 심지어 하루에 500만 건의 트위터도 가져와서 분석해요. 검색과 연관성, 누가 리트윗했는지까지.”
-인간의 말과 행동의 축적물을 보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엇이지요?
“무턱대고 상상하면 안 된다는 거죠. 상상하기 전에 관찰해야 해요. 관찰하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배려하게 돼요.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상한 상품을 만들고 이상한 조언과 배려를 하죠.
일례로 아들 생일 선물을 사려 해도, 관찰해야 뭐가 필요한 줄 알아요. 관찰하지 않으면 엉뚱한 배려로 상처만 주죠.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명절에 며느리에게 앞치마를 선물했던 것처럼요. 그걸 선한 엇갈림이라고 해요. 실수를 줄이려면 사람에 대한,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요.”
-데이터가 정말 삶의 에러를 줄여줄 수 있나요?
“최소한 시장의 에러를 줄여줄 수는 있어요. 소비자가 원하는 걸 만들면 팔리고, 어림짐작으로 대충 만들면 안 팔려요. 그걸 데이터가 확인시켜주죠. 가령 싱글이 늘어난다고 그들을 상대로 작은 세탁기를 내놓으면 안 팔립니다. 작은 세탁기는 이미 빌트인 되어 있고, 싱글들은 예상과는 달리 한꺼번에 대용량 빨래를 하거든요. 반면 냉장고는 작아져요. 저장 기능이 아니라 인테리어, 인스타 전시용으로 작고 컬러풀한 걸 사죠.
데이터를 알면 제품 개발의 무기가 늘어나요. 기업이 엄마들과 커뮤니케이션할 때도 ‘행복한 엄마’나 모성애’를 강조하면 시대를 잘못 읽은 거예요. ‘힘들지? 함께 해줄게’로 접근하고 슬로건을 만들 때 비즈니스 기회가 생겨요. 노인은 또 달라요. ‘힘드니까 도와드려야지’로 접근하면 싫어하세요. ‘실버세대를 위한’이라는 슬로건은 안 먹힙니다.
데이터에 따르면 노인의 의식은 “나는 안 늙었어. 친구만 늙었지’예요. 70세 전까지는 스스로 중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나이 드신 분들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욕망의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요실금 팬티를 팔려면 기능보다 ‘티 안나게’ 컨셉으로 해야 해요. 데이터는 물건보다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환경을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와줘요. 감사한 일이죠.”
1인 가구의 주방을 차지하는 스메그 냉장고. 기능보다는 디자인이 예뻐서 싱글들의 사진 촬영용 가전으로 인기다.
-소비 예측뿐 아니라 엄마와 노인들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걸 보면 데이터가 굉장히 인간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맞아요. 데이터는 당위가 아닌 실리로 증명해요. 가령 ‘착하게 살아야 기회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이거 맞나? 데이터가 이미 이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요즘 여기저기서 ‘모녀여행’이 떠요. 여행 파트너는 나이스하고 상호작용이 잘 돼야 하는데, 그 대상이 ‘엄마’로 모인 거예요. “맛있다, 좋다, 고맙다” 감탄하고 상대의 기분을 잘 맞춰주거든요. 아빠들은 불평도 많고 호응도 적어서 기운만 빠진대요(웃음).
관계는 상호작용이에요.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면 기회가 생겨요. 이런 발견은 제품으로도 연결돼요.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눈동자가 커지는데, 그걸 공략해서 서클렌즈를 팔죠.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어요.”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속담도 있지요.
“하하. 본인만 모르지 밖에서 보면 다 보여요. 메타인지가 안 될 뿐이죠. “이 차장이 어떤가?” 물으면 “뺀질대지.” 답이 다 나와요. 본인한테만 얘기 안 해주는 거죠. 흔적은 사방에 있어서 ‘한 길 사람 속’을 다 알 수 있어요. 요즘은 흔적투성이라, 아이들 방과 후 동선까지 부모에게 실시간 보고되는 시대잖아요.
빅데이터가 인간 행동 과정을 예측할수록 공정성과 준법 문제가 대두돼요. 조직도 조직의 수장도 법을 지키고 있는지 투명하게 공개되거든요. ‘일벌백계’라고 나는 안 걸리겠지 하는데, 완전히 오산입니다. 지금은 다 걸려요. 변화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어요. ‘왜 룰을 안지키지?’에 걸리면 개인도 조직도 와르르 예요.”
-결국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다 드러나서 필터링이 된다는 말이군요. 오래전에 JYP엔터테인먼트 사훈 중에 ‘준법정신’이 있는 걸 보고 의아했어요. 최근엔 YG가 사회적 물의를 빚고, JYP가 상승곡선을 타는 걸 보면서 ‘준법정신’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렇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채록되고 있거든요. 준법이나 규칙의 감수성이 달라져서 과정에 불의가 있으면 대중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어요. 건축 현장에서도 헬멧에 카메라 달면 3D로 과정이 다 기록돼요. 어찌 보면 감리도 필요 없어지는 거죠. 열 길 사람 속을 다 비추는, 진정한 투명사회로 가고 있는 거예요.”
-불투명했던 과정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면 또 뭐가 중요해지나요?
“제가 요즘 중요하게 보는 키워드는 세 가지예요. 공정성, 유연성, 독립성. 일단 공정성을 기준으로 조직과 개인의 규칙이 재정의돼야 해요. 이건 필수입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학습 경영 기반을 의심하고 유연성과 포용성을 발휘해야 해요. 의사결정에서 데이터가 들어갈수록 한 개인의 노하우는 덜 중요해지거든요. 그리고 점점 집단주의의 효용이 사라지면서 독립적 인간이 확산되고 있어요. 느슨한 연대는 늘지만, 인위적으로 끈끈함을 만들려는 노력은 안 먹히죠.”
마블의 ‘어벤저스’. 조직과 팀이 이런 형태로 개편되고 있다. 사수, 팀장, 사장 없이 1/n 역할 개념으로 다른 ‘크루’와 뭉친다.
-매년 출간되는 트렌드 관련 도서 중에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20’과 다음 소프트의 ‘트렌드 노트’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올해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는 ‘업글인간, 멀티페르소나, 팬슈머, 페어플레이어’ 등을 키워드로 뽑았는데, 다음소프트에서는 ‘혼자 사회’가 타이틀이더군요.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아 모이고 흩어지는 사람들… ‘혼자’를 중심으로 취향공동체의 ‘인싸’를 영위하는 삶인데요. 트렌드는 정해져 있어도 그것을 해석하고 제안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관심 층위와 결이 달라서예요. 관찰, 해석, 변화 유추에서 접근 방법이 다르니 묶어내는 결과물도 달라요. 김난도 교수가 트렌드의 원조집이라면 저희는 트렌드가 트렌드가 된 이유에 대해서 파고들죠(웃음).”
-2015년부터 싱글, 1인 산업, 천원 샵 등을 이야기했는데 ‘혼자’도 계속 진화하고 있나요?
“인구학자 조영태 교수와 토론한 적이 있어요. 인간의 미래에서 탄생과 사멸은 변하지 않는 상수지만 여직껏 인구 변화는 변수였어요. 그런데 저출산으로 한 해 출생 인구가 30만 명 선으로 고정되면서, 이제 인구감소는 삶의 예측에서 상수가 됐어요. 1인 가구, 혼자, 외로움은 사회 변화를 해석하는 데 고정 키워드예요. 그래서 ‘정해진 미래’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혼자 사회가 됐다고 관계의 욕구가 적어졌냐 하면 아니에요. 완성된 개인으로 더 공정하고 깊게 관계 맺기를 바래요. 취향공동체로의 쏠림이 그렇고 조직에서의 역할 변화도 그래요. 마블의 ‘어벤져스’가 왜 통했겠어요? 이젠 사수, 팀장, 사장 이런 개념 없이 1/n 역할 개념으로 다른 ‘크루’와 뭉쳐요. 능력 있는 친구들이 상하 위계 없이 다른 형태로 기여하고, 부족하면 보완해서 더 나은 개인으로 나타나겠다는 거죠. 그래서 공채도 없어지고 프로페셔널들이 힘을 얻는 거예요.”
-그런 ‘혼자 사회’로의 변화가 반가운 사람도 버거운 사람도 있겠습니다.
“사회변화는 중립적이에요.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충격이 생기죠. 준비하면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가만히 앉아 낡아가면 고립되는 거죠. 외로움이 싫으면 개인 네트워크를 만들고 열심히 준비해야죠. 나이 드신 분들은 계급장 떼고 사람 만나고, 관심과 결정의 지분도 1/n을 수용해야 해요.”
-네트워크가 넓어지면서 변화의 속도도 더 빨라진다는 느낌입니다.
“그야말로 글로벌 빌리지에 사는 25억 명이 강하게 연결돼 있죠. 이젠 전 세계 청년들이 미혼은 비혼으로, 저출산은 비출산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런 미래 예측은 사실 앨빈 토플러가 다 했습니다. 우리가 옛날 지식에 갇혀서 무방비로 지냈을 뿐. 이젠 후배들에게 조언도 해주기 힘들어요. 지식과 가치 기준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육감에서 빠져나와 데이터를 봐야 합니다.”
-데이터를 보면 우리가 굳게 믿었던 상식과 지식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수정되었다는 데 또 한번 놀랍니다. 컴퓨터 앞에서 이렇게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미소지으며)사실은 좀 무상합니다. 안 좋은 직업병이 있는데, 인생을 미리 본다는 거예요. 타인의 인생을 보면 허무하고 겸허해져요. 그렇게 흘러가겠구나, 예정된 미래에 우울감도 듭니다. 어쨌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게 삶이에요. 무상한 걸 알지만, 순간의 아름다움을, 행복을 즐겨야죠. 어차피 우리는 평생 불안과 권태 사이를 오가며 살아요. 그걸 인정하면서 변하는 세상, 변하는 감정을 관찰합니다.”
”UN의 생애주기에 따르면 65세까지 청년이고 기대 수명은 120살에서 더 늘어날 전망이에요. 눈높이를 멀리 둬야 해요.”
-‘원하는 걸 주고 원하지 않는 걸 안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빅데이터를 21세기 원유라고도 했지요. 이 21세기 원유는 누가 어떻게 쓰는 것이 좋습니까?
“어떤 조직이든 전체 사회의 효율과 배려를 높이는 데 써야죠. 데이터로 에러를 줄이면 효율이 높아지고, 원하는 것을 찾아주면 삶의 질이 높아져요. 거대 기업 구글의 사훈이 ‘악해지지 말자’ ‘옳은 일을 해라’인 건 이유가 있어요. 그게 장기적으로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죠.
타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환영받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건 나와 인류에 기여하고 싶어 하는 우리 종의 숙명이에요. 선한 의지로 좋은 시스템을 제공해온 건, 집단생활을 거친 인류의 본능이죠. 그런 소셜 밸류가 우리 각자의 행복도 결정해요.”
-마지막으로 2020년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면 좋을 지 조언을 부탁합니다.
“인생이 1월 1일에 확 달라지지 않아요(웃음). 그리고 인생은 생각보다 깁니다. UN의 생애주기에 따르면 65세까지 청년이고 기대 수명은 120살에서 더 늘어날 전망이에요. 요는 눈높이를 멀리 둬야 해요. 올해도 예년처럼 금연, 다이어트 결심하지 말고, 10년 후의 목표를 세우세요. 멀리 보면 자산이 만들어져요.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거든요. 데이터는 고령화, AI, 하이퍼커넥트를 가리키고 있어요. 이걸 알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합니까?(웃음).
인류의 삶은 어쨌든 나아지고 있어요. 힘든 일이 줄어들면 책을 읽고 공부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해요. 개별적 삶이 특이하다 느껴도 데이터가 쌓아온 인간의 삶은 갑남을녀로 다 비슷해요. 그 방향은 확연히 공동체를 생각하는 쪽입니다.”